법·제도 변화
계속되는 안티페미니즘 정치를 단호히 거부하자 - 성평등 관점 실종된 대선 공약에 부쳐
선거철에는 응당 정책 분석을 해야 한다. 어떤 정책이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방향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시민사회와 주권자의 책무다. 그런데 반성폭력 운동 단체이자 여성인권단체로서, 이번 대선에는 오히려 분석할 정책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분석 대상이 되었다. 선거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성평등 공약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이번 대선에서 성평등 공약이 실종되었다는 점은 특히 문제적이다. 민주주의를 훼손한 윤석열을 퇴진시키기 위해 123일 동안 광장을 지켜온 주체 중 상당수가 여성·소수자였기 때문이다. 언론과 정치권도 ‘2030 여성의 응원봉’을 광장의 상징으로 주목해 왔다. 그러나 정작 광장의 요구였던 성평등은 ‘논란’이 될까 두려워 침묵 되고 있다. 이런 침묵 속에서 ‘여성 공약’을 찾으려면 돋보기가 필요한 지경이다.
주요 대선 후보들의 성평등 공약을 찾아서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4월, ‘여성·남성’ 대신 ‘청년’으로 통칭하는 ‘성별 지우기 전략’을 수립한 후, 이재명 후보는 실제로 ‘여성’ 없는 10대 공약을 발표했다. 각각 범죄 대응과 경제 공약에 위치한 교제폭력 범죄 처벌, 여성 소상공인 안심콜 의무화 정책을 그나마 여성 관련 공약으로 쳐줄 수 있는 상황이다. 비판이 이어지자 지난 5월 16일, 이재명 후보는 개인 SNS를 통해 “여성이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은 “가스라이팅이나 스토킹 등 새로운 형태의 여성폭력에 대한 제도적 예방 시스템을 강화”하겠다는 정도였다. 이마저도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후보의 성평등 공약은 계속해서 퇴보하고 있다. 20대 대선에서는 선거에 패배한 원인으로 페미니즘을 탓했으며, 21대 국회에서 성평등 입법을 주도했던 여성 의원들은 당내에서 배제되었고, 22대 국회에서는 의석 과반을 차지했음에도 밀려있던 여성·성평등·차별금지 법안을 입법하지 못했다. 이런 행보는 이번 대선토론회에서도 여성·성평등·차별금지 법안에 대해 “방향은 맞지만” 추진할 수 없다는 답변과, 언급조차 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차 드러났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더욱 퇴행적이다. 1999년 헌법재판소가 성차별 위헌 결정한 군가산점제 부활을 느닷없이 공약했다. 5월 20일 추가로 발표한 ‘여성공약’도 형량 강화를 골자로 한 구체성 없는 젠더폭력(“교제폭력·가정폭력·딥페이크 범죄”) 제도 정비만을 얘기하고 있다. 비혼 가구를 위한 ‘지정돌봄인’ 제도와 HPV 백신 무료 접종 확대를 공약하기도 했지만, 이는 정작 시민사회가 그간 요구했던 가족구성권과 성과재생산권리의 관점과는 동떨어진 매우 협소한 공약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마비시킨 여성가족부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는 점이다. 이는 여성 대상 흉악범죄 이슈가 불거지자 도심에 장갑차를 배치하며 안전을 지키겠다던 이전 정부의 전시행정과 다를 바 없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한술 더 떠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1순위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통령 힘빼고 일 잘하는 정부 만든다”는 공약 제목은 성평등을 위한 모든 힘을 빼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만큼 황당하다. 이준석 후보는 공보물과 토론회 등에서 ‘노무현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유세하고 있으나, 실상은 여가부 폐지로 소수자 혐오와 젠더 갈라치기를 일삼던 ‘윤석열 정신’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의 “차별 없고 안전한 공존 사회” 공약은 이 가운데서 희망을 준다. 여성가족부를 부총리급 성평등부로 격상,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강간죄의 성립요건을 ‘폭행과 협박’으로 한정하고 있는 현행 형법을 개정하는 ‘비동의강간죄’ 도입, 낙태죄 폐지 이후 대체 입법으로서 안전한 임신 중단과 여성의 성 재생산 권리 보장법을 도입하는 등을 제시했다. 이는 광장에서 가장 많이 얘기되었던 ‘차별금지·성평등·인권·소수자권리’(온라인 공론장 천만의연결 조사 결과 25.9%)을 명확히 반영한 것이다.
반민주주의와 극우 세계관 타파를 위한 성평등 정치 요구한다
작년 겨울부터 올해 초봄까지 광장을 지켜온 이들은 내란종식을 위해서야말로 적극적으로 차별의 구조를 다루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법계엄과 독재를 꿈꾸던 세력이 바로 구조적인 혐오와 차별을 토대로 반민주주의와 극우적 세계관을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내란종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성평등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후보들은 성평등 관점은 실종시킨 채, 비판을 받으면 ‘여성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구조적 성차별은 있다’ 정도의 발언을 하는 데 그치고 있다. 차별의 원인이 젠더 구조에 있다는 것을 정말 이해하는 대통령 후보라면 하루빨리 차별 없는 사회, 성평등 관점이 반영된 공약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윤석열 퇴진 광장 이전에도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싸우며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2017년의 대통령 퇴진 국면에서도 ‘성평등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고 외쳤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앞세운 정부조직 개편안이 발표되었을 때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2,500여 명이 성평등추진체계 강화 필요를 요구했고, 여성살해 사건을 마주했을 때는 90여개의 여성·인권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성평등해야 안전하다’는 행동을 조직했다. 성평등 공약의 실종에 낙담하고 있을 때만은 아니다. 성평등을 약속하지 않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번 대선의 성평등 공약 실종에 분노한다면, 차별없는 사회, 성평등 관점을 반영한 정책에 투표하자. 우리의 삶과 세상은 우리 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2025.05.27.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