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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북클럽 다불다불 <극우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 [ ]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 2026-08-07
  • 41

[ ]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극우는 [ ]에서 태어난다. 빈 괄호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을까? 


오랫동안 극단주의를 연구해 온 미국의 사회학자 신시아 밀러 이드리스는 괄호 안을 일상 공간으로 채워 넣는다. 대학 캠퍼스, 격투기 체육관, 온라인 게임 채팅방, 유튜브 요리 채널… 극단주의는 사람들의 불안을 땔감 삼아 조용히 세를 확장하고 있다. 극우 사상은 위계와 배타성을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에 우열을 나누고, 지배 집단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러한 생각이 극단화될 때 주류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은 ‘열등 인간’으로 분류되며, 이들에 대한 폭력은 곧잘 정당화된다. 


신시아 밀러 이드리스는 극단주의가 확산되는 원인과 과정만큼, 극단화가 일어나는 ‘장소’와 ‘시기’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극단화는 진공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도시 한쪽을 차지한 극우 시위대와 정장을 빼입은 극우 정치인을 번갈아 마주치며, 혐오를 재료로 만든 옷과 음식을 장바구니에 들이며, 주변부에서 극우의 중심부로 이끌려 간다. 이때 공간과 장소는 추상적인 개념에 그치지 않고 극우의 구체적 발원지가 된다. 그러므로 극우 운동을 정치적 결사나 거리 시위로만 이해하는 시각은 극단화의 한 면밖에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극우에 대한 납작한 해석을 넘어, 말하자면 극단주의로 향하는 ‘문’들에 집중하는 신시아 밀러 이드리스의 연구를 담은 책의 제목은 『극우는 어디서 태어나는가』(신시아 밀러 이드리스, 조인석 옮김, 동아시아, 2026)이다.


지난 목요일 저녁, 이 책을 소중히 품에 안은 사람들이 차례로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페미니즘 북클럽 ‘다불다불’ 참가자들이었다. 둥글게 모여 앉은 이들은 책장을 넘기며 들었던 고민을 나눴다. 극단화의 토양이 되는 생각들을 걷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까? 일상에 쉽게 스며드는 극우의 전략을 거꾸로 우리 운동에 활용할 수는 없을까? 우파 밈(meme) 전파는 쉬운데 왜 우리는 뭐 하나 설명하는 데 한세월이 걸리나… 짧고 굵게 말하면 좋겠지만 좌파 농담은 자칫하면 혐오로 삐끗하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같다. 농담은 누군가의 일부를 매우 크게, 혹은 아주 협소하게 조명할 때 가능해지는데 그런 일은 가뜩이나 현실에서 이미 대중의 입맛에 맞춰 스스로를 재단해야 했던 이들에게 영 즐겁지 않다. 좌파 코미디언은 끝내주는 펀치라인을 준비했다가도 객석에 앉은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제 손으로 다이빙대를 낮춘다. 웃음과 재미가 중요한 세상에서! 물량 공세는커녕 이토록 까다로운 관객이라니 어딘가 불리하다... 


이어진 참가자들의 고민은 일상과 밀착해 있었다. “체육관에서 만나는 남자들이 극우화된 게 점점 더 잘 느껴져요.” “중학교에 강연을 하러 가면 ‘노력하지 않았으면 보상받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나와요. ‘왜 저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의 몫까지 챙겨야 하냐’는 거죠.” 노력한 자만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은, 어떤 노력이 무수한 자원과 기회, 사회경제적 배경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 논리를 체득한 이는 자신의 실패를 불평등을 만들어낸 구조가 아닌 우대 조치를 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탓으로 돌린다. 이들이 순수한 노력이 아닌 제도의 수혜로 이득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는 극우의 이념적 축을 담당하는 ‘배타적 신념’과 연결된다. 유색인종,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가 우월한 백인 남성의 몫을 빼앗았다는 오랜 주문은 장애인, 빈자, 홈리스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게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과 다름없다는 말로 2026년 한국에서 되풀이된다. 주류 집단이 느끼는 공포와 위협은 종종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범죄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활시위를 당기는 데 힘이 덜 들어간다는 이유로 화살이 구조를 공고화한 권력 집단이 아닌 아래로, 가장 약한 자에게로 향한다면 상층부의 권력은 영원히 해체될 수 없다. 극우의 주장이 갈등을 증폭할지언정 근원적 문제 해결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후련함보다는 막막함이 더 많이 남는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극우에 비하면 너무 미약하게 느껴져 한숨만 내쉬지는 않았다고도 적어둬야겠다. 그날 나는 [ ]로 시작하는 또 다른 목록을 채웠기 때문이다. [ ]에서 태어날 수 있는, 즉 학교와 체육관과 문화 커뮤니티, 축구 경기장, 그리고 박람회에서 우리가 만들어 왔고 목격해 온 것들을 떠올렸다. 대학은 권력자만을 위한 지식을 생산하는 곳으로 간주되어 극우의 표적이 되고 있지만, 동시에 우생학 연구, 노예 소유, 인종차별주의자의 이름을 건물명으로 사용해 온 과오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체육관에서 극우들은 청소년을 링 위로 불러내 싸움을 통해야만 남성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지배적 남성성’을 주입하지만, 그에 맞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된다고 말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들 역시 늘고 있다. 


한 참가자는 웹툰 시장이 극우화된 원인으로 자본주의의 팽창과 가속화된 기술 발전을 언급했지만, 동시에 그 덕에 이전에 이야기되지 못한 비주류 소재를 다루는 웹툰이 등장하고, 사회 운동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음을 짚었다. 극우의 거점인 [ ]는 달리 보면 우리의 개척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목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게 아주 중요해진다.


한편 위에선 ‘극우’와 ‘우리’가 완전히 다른 집단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도, 설령 그렇게 선을 긋더라도 그 선을 넘으려는 시도를 완전히 멈춰서는 안 된다는 말도 하고 싶다. 모임에 온 이들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음 깊이 ‘우리’라고 여겼던 이에게서 극우적 면모(?)가 발견될 때,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고개를 빼꼼 든 극단주의를 마주했을 때… 남은 게 관계를 완전히 끊는 선택지밖에 없을까? 그랬다면 지금도 그다지 넓지 않은 인간관계가 얼마나 더 좁아졌을지 감도 안 온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를 설득하고 가끔 언성 높여 싸우기도 하며 끝끝내 서로를 이해하고, 또는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그러려고 애쓴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 네가 밉지만 같이 놀고는 싶어서 서로를 밀고 당기며 엉성하게 만든 합의점에 대해. 어쩌다 누군가 그 선을 넘어도 부러 눈감아 주던 날들을. 그럼 눈치를 보며 조금씩 안으로 뒷걸음질치던 네 뒷모습 같은 것들을. 같이 밥 먹고 수다 떨고 싶어서 서로에 의해 마모되기를 허용한 어떤 장면들을. 흑이나 백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그런 뿌연 일들이 실은 내 생활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고 집 가는 길에 회상한 이해하게 된 순간의 기쁨에 관해서도.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데서 오는 수치심과, 그런 나를 바꿔야 하는 수고로움보다 더 커다란 게 있다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새로운 앎을 그 위에 덧대는 것이라고 현명한 친구들이 알려주었다.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과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수 있는 소통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말해준 친구들의 용기가 나를 여러 번 갱생(?)시켰다. [ ]에서 극우 말고도 많은 것이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건 순전히 최선을 다해 목록을 늘려갈 용감한 이들을 여럿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의를 베푼 시간이 무용해지지 않도록… 당분간은 나 역시 회색 지대에서 열심히 뒹굴 생각이다.


이 글은 자원활동가 세민님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