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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도 변화

성폭력 및 여성 인권 관련 법과 제도를 감시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법 제·개정 운동을 소개합니다.
[단호한시선] 차별을 갈등으로 바꾸는 국민통합위원회 규탄한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역차별 담론’이다.
  • 202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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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한시선] 차별을 갈등으로 바꾸는 국민통합위원회 규탄한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역차별 담론’이다. 


지난 12월 17일, 대통령직속 국민통합위원회가 개최한 “2025 세대·젠더 국민통합 컨퍼런스(이하 컨퍼런스)”와 그 결과로 도출한 국민통합위원회의 메시지를 우려하고 비판한다. 대통령 직속 자문 기관인 국민통합위원회는 ‘이념·지역·양극화·세대·젠더’를 5대 사회 갈등으로 지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 대화 기구’를 자임하며 설립되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차별을 ‘갈등’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통합하겠다는 구상부터 문제적이지만, 이번 컨퍼런스는 그 문제성을 한층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여성에 대한 구조적 성차별과 ‘남성 차별’이라는 감정을 마치 대등한 충돌인 것처럼 설정하며 이를 ‘젠더 갈등’으로 호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차별을 해소하기는커녕 왜곡하는 역차별 프레임을 국가 차원에서 제시한 행위이며, 차별을 갈등으로 회피하면서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오히려 갈등을 조직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컨퍼런스에서 오간 발제의 세부 내용은 ‘젠더 갈등’을 어떻게 정의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선택을 그대로 드러낸다. ‘남성 차별’ 인식이 증가하는 원인이자 극우 정치 세력의 결집 이유로 페미니즘과 성평등 정책을 지목한 것이다. 성평등 정책이 남성 차별 인식을 조장하고, 그 결과 청년 남성이 보수·극우화될 수 있다는 잘못된 인과관계를 국민통합위원회는 아무런 비판 없이 제시했다. 이 논리를 국민통합위원회가 다루겠다는 다른 ‘사회 갈등’에 대입해보자. ‘민주주의 제도를 강화했더니 보수층이 차별받는다고 느낀다’거나,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강화했더니 수도권 주민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부의 재분배 정책을 시행했더니 상류층이 역차별을 느낀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감정을 정책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를 분명히 반박하는 것이다. 차별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감정의 문제로 탈바꿈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국가를 시민은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 


컨퍼런스는 성폭력 무고에 대한 남성 공포를 강조하며(정한울, 천관율 발제), 가정폭력 신고 시 가해자 즉시 분리 조치,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규정한 해외 입법례를 ‘남성 차별’ 인식을 조장한 정책의 예시로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평등 정책이 극우 정당의 부상을 야기했다고까지 주장한다(김조은 발제).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가정폭력을 포함한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은 수사기관이 ‘사소한 것’으로 보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통념이 강하게 작동하여 적극적 개입을 하지 않고 수사과정이 지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친밀한 관계 내 폭력 피해자들이 수사기관에서 경험하는 광범위한 2차  피해를 고려할 때, 가정폭력 신고 시 가해자 즉시 분리 조치는 젠더기반폭력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현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성폭력 무고 역시 오래된 ‘꽃뱀’ 서사의 반복에 불과하다. 2019년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 처리 인원 중 무고로 기소된 비율은 0.78%이며, 유죄로 인정된 비율은 0.42%에 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장된 무고 담론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을 광범위하게 확산한다. 피해자 지원 현장에서는 ‘피해자다움’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이 무고로 공격당하거나, 무고로 역고소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소 자체를 포기하는 현실을 매일같이 마주한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 형법 상 강간죄 구성요건이 동의 여부가 아닌 ‘현저히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으로 협소하게 정의되기 때문에 격화된다. 권력관계와 위계를 이용한 성폭력, 피해자의 취약한 상황을 이용한 성폭력, 성적 촬영물 유포를 빌미로 한 성폭력 등이 우리 형법에서는 여전히 강간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강간죄 구성 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는 요구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이기도 하다. 성평등 정책이 극우의 결집을 불러왔다는 주장은 극우 세력의 자기 정당화 논리를 그대로 받아쓰는 일이며, 정책 실패의 책임을 외부로 전가하는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남성 차별 인식이 40대 이상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국민통합위원회의 보도자료 헤드라인은, 통합을 명분으로 성차별 구조에 대응하는 정책 자체를 무력화하는 언설이다. 정부는 젠더기반폭력을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감정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적극적 정책 입안 대신 유권자 여론 관리로 이를 대체하려 하는가?  성차별을 해결하지 않은 채 ‘남성 차별’을 앞세우는 것은 통합이 아니라 책임 회피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누구도 편들지 않는다’는 국가의 말은 실제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통합이라는 이름의 침묵을 강요하지 말고, 반성폭력 의제를 무력화하지 말라. 구조적 폭력을 성평등 관점에서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 있는 정책을 수립하라. 


2025.12.22.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