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바지, 똥꼬, 개미, 삼겹살
부모로서 나의 성인식은 몇점 짜리인가?
김홍미리 |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
문제는 속바지였다.
길고 지난한 싸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그리고 나 자신과 싸움 말이다.
큰 딸이 기저귀를 떼면서부터 문제는 시작됐다. 원피스 안에, 팬티 위에, 속바지를 반드시 입히는 남편과 왜 굳이 속바지를 입혀야 하느냐는 나의 입장이 엇갈렸다. 엄마인 나는 어릴 때는 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고 커서 치마를 입어야 할 때도 속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다. 아들을 낳으려다 딸만 낳은 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들은 나에게 치마를 입히지 않았고, 고등학교 시절 교복 치마를 입기 시작했을 때는 여성용 속옷을 챙겨줄만한 사람이 내 주변에는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나의 불우한(?) 환경이 치맛 속 나의 자유를 보장했다고나 할까.
반면, 나의 딸들은 딸의 - 딸로서의 - 삶에 관심이 무척이나 많은 부모에게 양육되고 있다. 엄마인 나의 패션감각을 신뢰하지 않는 남편이 아이들의 옷을 주로 코디한다. 하기에 거의 매일같이 속바지 문제가 대두된다. 남편이 속바지를 입혀 놓으면 슬쩍 내가 벗겨 보내는 은근히 스릴 있는 싸움이랄까. 남편에게 속바지를 입혀야 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물으면 “에이 어떻게 안 입혀 여자앤데.”한다. 그리고, “(안 입히면) 이상해~.” 한다.
남편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아성폭력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성폭력을 다루는 신문이나 방송들은 가해자의 그릇된 ‘욕망’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왜곡하고 있고, 관련 정책 역시 가해자에게 성욕억제제를 투입한다는 등 성폭력을 다시 충동/욕망의 문제인 양 떠들어댄다. 이런 상황에서 욕망의 대상이 될 여지가 많은 - 딸들을,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단속하는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된다. 속바지를 입히는 남편의 심리는 분명 그런 불안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유아성폭력과 속바지의 상관관계는 밝혀진 바 없고, 밝혀질 리도 없다. 충동적이 아니라, 치밀하게 탐색하고 계획적으로 벌이는 가해자의 범행이 그따위 속바지 하나에 좌우될 리가 없지 않은가.
나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속바지를 놓지 못하는 남편은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모래 들어가면 어떡해”
“어디에?”
맙소사. 이제는 딸의 성기에 모래가 들어갈 걱정을 한다. 들어가긴 뭐가 들어가나. 어릴 때 나도 성기에 뭐가 들어간다는 식의 유언비어를 많이 들었다. “대중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물 속에 떠다니던 정자가 거기에 들어가서 그 여자 임신됐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말이지만, 나는 이 루머를 듣고 다시는 대중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속바지에는 쿨한 나는, 알몸에는 쿨하지 못하다.
아이들이 목욕하고 나와 알몸으로 집안을 돌아다닐 때, 나는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팬티 입어! 똥꼬에 개미 들어가!”
그 말을 하면서도 ‘아니 이게 말 되는 거야?’ 하고 생각한다. 내가 대중목욕탕을 가지 못하는 것처럼, 딸들에게도 팬티를 입지 않으면 보지에 뭔가가 들어간다는 공포를 심어주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은) 한다. 그러면서도 “똥꼬에 개미 들어가”는 아이들에게 가장 빠르게 옷을 입히는 방법이며 나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기에 기꺼이 내뱉는다. 대중목욕탕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사회가 나에게 준 잘못된 신념인지, 아이들이 맨몸으로 침대며 쇼파, 놀이방을 돌아다니며 “철퍼덕” 앉아 놀 때면 나는 혹시라도 “뭐가 들어갈까봐” 불안하다.
성기를, 딸아이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은 나에게 끊임없는 물음을 묻게 한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 하나, 누군가로부터 보호할 것인가, <무엇을 보호할 것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그리고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2010년 어느 날 큰 아이가 말했다.
“엄마, 허지원 오빠가 자꾸 <별이 잠지는 삼겹살>이라고 놀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몹시 당황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두서없이 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봤던 것도 같다. “오빠가 니 잠지를 봤냐, 언제 그런 말을 했냐, 너도 오빠 고추 봤냐” 등등등……. 삼겹살은 무슨 뜻으로 한말일지, 딸아이의 보지를 본 다음에 대음순 소음순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말장난을 한 건지…… 생각이 많아졌다.
‘무슨 일이 있었나? 폭력인가? 아니면 아이들끼리의 성적 놀이인가?’ 폭력이든, 아이들끼리 성적 놀이든 둘 다 나에겐 당황스러운 일이다. 아니 성적 놀이라면 더 당혹스러울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무얼 물어보고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남자아이의 부모를 만나야 하나? 그 아이에게 무엇이 잘못이라고 말해야 하나, 생각은 더 복잡해졌다. 폭력이라면 가해자라 하겠지만 놀이라면 그 뭣도 아니다. 폭력이라면 사과를 받고 어린이집을 나가라고 요구하겠지만 놀이라면 내 딸도 즐거웠던 놀이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말장난 일수도 있었다. 이 사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린이집 선생님, 원장님과 상의했지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딸아이 있는 부모들의 유난 정도로 마무리 된 듯 싶다.
딸 둘 키우는 페미니스트로서, 아이들에게 언제든 올 수 있는 성폭력의 가능성을 안다. 그리고 항상 내가 엄마로서 담담하고 당당히 대처할 것이라는 신념(?)이 있다. 헌데 그런 의지는 일상의 소소한 부분에서 마구 흔들린다. 나 역시 딸들을 성적으로 보호만 하려 하고 있고, 통제와 보호 아닌 다른 방식의 언어를 찾지 못했다.
최소한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이 아닌 몸으로 알려주려고 했건만, 내 몸은 소중한 것이라는 말에 밀려, 나조차 <소중하니까 보호해야 하는 몸>으로 아이들의 몸을 길들여가는 게 아닐까. <자유롭기보다는 안전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속바지와 똥꼬, 개미, 삼겹살…… 이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엄마가 진정 되고프다.
김홍미리 딸 둘 키우는 페미니스트. 딸 셋을 낳아 키우는 게 꿈이지만 하나 더 나으면 인생이 내 소멸될 것 같은 공포로 인해 그 꿈을 포기한 엄마이며, 과연 인간이 인간을 ‘키운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를 골백번 자문하는, 소심한 엄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