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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의미의 불일치 (연재 3/3)
  • 페미니스트 가수/성문화운동 자문위원 지현
몸이야기

몸, 의미의 불일치
– 말하는 몸

⊙ 페미니스트 가수/성문화운동 자문위원 지현

얼마 전 우연히 시사 프로그램을 보다가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일명 나영이 사건, 조두순 사건이라 불리는 끔찍한 아동성폭력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피해 아동이 입은 상해는 너무나 심각했고, 안전함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아이가 걸었을 그 길 위에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던 그 자를 만났을 것을 생각하니, 그 섬뜩함에 이 사건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동성폭력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모습

우리는, 언론은, 법은 이 사건을 아동성폭력 사건이라 부릅니다.

“아동성폭력”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아동성애자”가 떠오릅니다. 아동에게 행해지는 성폭력은 아동성애자에 의해 저질러졌을 것이라고 전제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궁금해졌습니다. 성폭력은 성애로 인해 벌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애의 정의에 따라 아동 성폭력을 다시 설명하면 “남성과 아동 사이에 일어나는 성적 본능에 의한 애욕에 의해 저지른 범죄”가 됩니다. 다시 말해 범죄를 저지른 자는 성적 본능에 의한 애욕을 지닌 자이고, 그 본능이라는 것은 때로는 제어하기 어려운 어떤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성범죄, 성폭력은 때때로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몇몇 남성들의 찌질한 실수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한밤중에 건물 3층, 여성이 혼자 사는 원룸에 가스 배관을 타고 올라가 성폭행을 하여도 “취해서 한 실수”라는 이유로 감형이 되거나, 정상 참작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 조두순 사건과 같은 살인 미수의 사건에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 범죄의 잔인함을, 그 범죄의 공포를 “성애”의 야릇한 뉘앙스로 가려버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야릇함은 인터넷 공간에서 유통되던 “나영이 사건 진상”의 자세한 이미지들에서도 느껴졌습니다. 그 끔찍한 사건은 글로 공공의 공간에 재현되었고, 유통되었고, 그것은 마치 스너프 필름처럼 관음의 욕망을 자극하기도 하였습니다(조두순을 대신해 나영이와 여성들에게 사과하던 수많은 남자들의 댓글은 그들의 ‘지켜보기’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서술은 마치 객관적인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재현방식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에 주저함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건의 이미지들은 마치 전장의 사진들처럼 당시를 증언하는 증거물로서만 여겨졌고, 재현의 윤리나 바라보는 것의 윤리에 대해서는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몸을 둘러싼 의미의 불일치 #1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에 선 아이의 발

그날 아침 나영이는 학교에 가고 있었겠지요. 내가 나영이였다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있을 수업 중에서 음악 시간이 가장 기대가 되었고, 학교를 마치면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공부방에 갈 생각에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오늘 입은 옷은 물려받긴 했지만 세련되고 색깔도 예쁜 옷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고, 내년에는 2학년이 될 것이고, 학교를 마치면 공부방에 가서 친구들과 숙제를 하고, 내 팔에는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고, 몸무게는 20키로가 조금 넘고, 유치원에 다닐 때는 들지 못했던 무거운 것들도 이제는 잘 들 수 있고, 발은 160mm인데, 오래 오래 신으라고 180mm의 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머리는 혼자 묶지 못해서 아침마다 엄마가 묶어주고…….

나영이, 아니 나의 몸에는 이런 생각들이, 이야기들이 숨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만난 그에게 나영이, 아니 나의 몸은 이런 이야기들은 다 지워진 채, 그저 한 팔로 덥석 들어 데려갈 수 있는, 위협하면 쉽게 말을 듣고, 주먹으로 한 대 치면 의식을 잃고 반항하지 않을, 말랑하고 체온은 있지만, 힘은 세지 않고, 크기가 작은, 다루기 쉬운 어떤 물건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가 의도하는 용도에 맞게 사용하고, 사용하고 난 후에는 흔적이 남지 않도록 처리해서 버릴 수 있는 그런 물건.

나영이, 아니 나는 생명이고 삶인데, 그에게는 폐기 가능한 어떤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이러한 의미의 불일치가 그 사건을 겪은 나영이, 아니 나에게는 크나큰 상처로, 상해로, 장애로, 목숨의 위협으로 남았지만, 그에게는 그저 뒤처리를 제대로 안하고 버려 둔 실수로 남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두순이라 불리는 그 자는 죄를 뉘우칠 수 없고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할 테니), 형을 마치고 나오면 또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 할 지도 모릅니다. 조두순의 범죄나 1992년 발생한 미군에 의한 여성 살해사건이 끔찍한 이유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훼손해도 가책을 느끼거나 죄의식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이 이상한 개인의 돌출적 행동이 아니라 현 사회에 만연해 있는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몸을 둘러싼 의미의 불일치 #2

요즘 텔레비전에 유이라는 가수가 나옵니다. 유이는 소주 광고를 찍었습니다.

메이킹 필름에서 유이는 그 광고에 출연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짧은 바지를 입고, 셔츠를 내려 어깨를 드러내고는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합니다.

그 광고를 촬영하면서, 애프터 스쿨이라는 댄스 가수 팀을 하면서 유이는 안무 선생이 지도하는 대로 춤을 잘 추면, 광고 관계자들에게 협조를 잘 하면, 그러면 대중문화 산업으로 부터 사랑 받고, 가수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이의 허벅지를 강조하는 춤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몸짓인 것입니다.

소파에 앉은 여성의 다리

그렇지만 광고를 촬영하는 남자들은 그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카메라를 아래에 두고는 유이의 허벅지의 움직임이 가장 육감적으로 보이도록 앵글을 잡아 그녀를 촬영합니다. 결과적으로 유이의 “성공하기”, “인정받기”의 노력은 허벅지에 초점이 맞춰진 관음증적 시선으로 다시 보이게 되고, 그 광고를 본 남성 대중과 언론은 그녀의 허벅지를 꿀벅지라고 부르기에 이릅니다. 물론 언론이 그녀의 허벅지를 그렇게 명명하게 된 것은 소속사가 배포한 보도 자료가 제 역할을 제대로 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유이는 자신이 피땀 흘려가며 노력한 결과가 (춤을 저렇게 잘 추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피땀을 흘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관음증에 의해 소비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인간과 옥수수. 거리를 좁히기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성문화운동 자문위원으로서,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나는 늘 성폭력 없는 세상을 꿈꾸고, 그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우스갯소리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상징계를 언급하며 했던 이야기인데, 스스로를 옥수수로 생각했던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옥수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닭에게 먹힐까봐 두려워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불편할 정도여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답니다. 의사가 완치되었다고 진단하고 퇴원시켰는데, 얼마 후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가 돌아왔습니다. 의사가 왜 돌아왔냐고 물었더니, 가다가 길에서 닭을 만났다고, 그래서 너무 두려워서 도망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의사는 당신은 이제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않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그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닭이 알고 있을까요?”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성폭력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과 여성들을 옥수수로 생각하는 ‘어떤’ 남성들. 옥수수가 되었던 경험을 한 여성들은 닭일지도 모르는 남성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둘 사이의 해석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면 반성폭력 운동의 결실을 거두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과 옥수수, 두 의미의 거리를 좁힌다는 것은 말이 쉽지 너무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립니다.

나영이 같은 소녀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삶을 지속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때 가해자를 잘, 효율적으로,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처리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대신에, 어려움에 처한 소녀들을 직접적인 방법으로 돕는 대신에, 이렇게 너무나 커서 그 실체를 볼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회가, 여성이, 남성이, 또 다른 생명들이 서로의 몸에 대해, 서로의 삶, 생명에 대해 각각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다른 가치를 부여한다면 이런 견디기 힘든 사건들이 계속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데도 큰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영이가 겪은 일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