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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위한 심리치료
  • 심리학 박사/미국 뉴욕주 심리학자 조용범
쟁점과 입장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위한 심리치료

의자 사진

⊙ 심리학 박사/미국 뉴욕주 심리학자 조용범

성폭력 피해생존자와의 만남, 미국 그리고 한국

성폭력 피해생존자들과의 만남은 뉴욕에 있는 롱아일랜드 쥬이시 메디컬센터에서 수련을 받기 시작했던 90년대 말부터였다. 당시 경계선 성격장애 진단을 받은 여성들은 자살행동이나 협박과 같은 증상 때문에 전문가 사회에서 치료를 꺼려하였는데,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아동청소년기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를 폭력적으로 훼손당한 이들은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고, 그 후유증은 다양한 정서적·성격적 장애로 이어져 고통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후 한국에서 피해여성들을 만나면서 나는 이들에 대한 선진국 수준의 지원과 심리치료에 앞서 기초적인 법률이나 피해자에 대한 보호적인 사회적 인식조차 낮은 수준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동기 때 친부나 의부에 의한 성폭력 사실이 증명되어도 이들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며 같이 거주하고 있기도 했고, 분명히 친족의 성폭력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도 가해자를 조사하거나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생존자들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굴종, 심지어는 2차, 3차의 성폭력 희생자로 살고 있었다.

피해자 따돌리기와 낙인찍기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기본적인 동정과 지원보다는 왕따 문화적 따돌림을 통해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오히려 낙인을 찍듯 이들을 정신병리적인 시각만으로 판단해 버리기도 했다. 아마도 성폭력상담소와 여성단체의 지속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성폭력 피해생존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지금보다도 더 후진적인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성폭력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 생물학적 원인이 아닌 가해자

장애에 대한 병리적 치료 이전에 예방과 법적 제도 마련이 우선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겪는 고통은 생물학적 혹은 유전적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질병과는 차원이 다르다. 성폭력 이후 이들이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은 외상의 반복적인 재경험, 이와 연관된 생각이나 감정을 회피하는 증상, 수면장애와 같은 과도한 불안과 각성상태, 분노감을 수반하게 된다. 이러한 정서적 반응은 충격적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것이지만 성폭력은 가해자가 있다는 점에서 재난이나 개인적인 상실로 인한 외상(trauma)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해자의 폭력에 의한 피해자인 경우, 정서적 장애는 비슷하더라도 외상을 일으킨 원인이 되는 가해자에 대한 법적인 정의실현이 우선적으로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폭력 피해에 따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가해자의 폭력이라는 외적사건이기 때문에 가해자의 성폭력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과 법적 처벌을 강화하는 제도가 있다면 발생률이 낮은 장애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거시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당장 발생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지원시스템과 심리치료 등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vidence based psychotherapy와 치료효과 그리고 알 권리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에게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경계선 성격장애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이나 선진국의 경우 이러한 장애에 대해 엄격하게 통제된 연구를 통해 검증된 심리학적 치료를 주치료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험과학적으로 검증된 심리치료(Evidence based psychotherapy) 움직임은 지난 70여 년 간의 단순대화중심의 심리치료와 상담기법이 실제로 호소하는 증상의 경감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학계와 보험업계, 정부기관의 비판 이후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미국의 연구기관과 정부기관, 소비자들은 자신이 받고 있는 심리치료가 어떠한 효과가 있으며 효과성은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해 알 권리를 주장하고 있고,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 보건국 산하 연구 및 예산집행기관인 약물중독 및 정신건강 서비스청(Substance Abuse and Mental Health Services Administration, www.samhasa.gov)에서는 공개적으로 검증된 효과적인 심리치료기법을 등재하여 소개하고 있다.

PE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치료방법은 Prolonged Exposure Therapy(PE)라고 하는 지속적 노출치료이다. 이 기법은 팬실베니아 의과대학 교수인 심리학자 에드나 포아(Edna Foa) 박사가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정제된 방법으로 평생을 바쳐 연구한 기법이다.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겪는 감정적·인지적 회피를 기억회상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왜곡된 기억과 인지를 수정하는 심리치료 기법으로, 그 효과는 수백 편에 이르는 임상적 연구에 의해 검증되었다.

DBT

마찬가지로 경계선 성격장애에 대한 SAMHASA에 등재된 유일한 치료방법은 Dialectical Behavior Therapy(DBT)라고 하는 다이어렉티컬 행동치료이다. 이 치료 방법은 워싱턴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마샤 리네한(Marsha Linehan)에 의해 연구되고 개발된 것으로서 감정격변이나 감정조절장애의 문제, 만성적 자살이나 자기파괴적 행동을 보이는 경계선 성격장애 치료에 획기적인 효과가 검증되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위한 다이어렉티컬 행동치료와 지속적 노출치료는 모두 미국 보건국의 SAMHASA에 해당 장애를 치료하는 심리치료 기법으로 등재되어 있다. 앞서 말한 두 심리학자는 오직 성폭력 피해자와 자살 위기자 등 음지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소수자를 위해 연구자로서의 삶을 헌신하였으며 누구보다도 한국의 여성운동과 활동가들의 노력에 감동하는 동역자이기도 하다.

외상 이후, 정서장애와 미래의 기회 상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발전된 피해자의 경우, 2차적으로 다양한 정서장애와 성격적 장애가 나타난다. 특히 심각한 것은 경계선 성격장애 증상이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감정적 기복이 심하거나 분노와 짜증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 주체하기 어렵고, 대인관계가 불안정하여 지속적으로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장애다. 행동적으로는 자살행동이나 자살위협, 혹은 자기파괴적 행동이 지속되어 생명손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성격장애로의 발전은 감정적 민감성을 타고난 생물학적 소인과 성폭력이나 폭압적 환경 등으로 인해 나타나는 비수인적 환경요인이 어느 정도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수적으로는 우울이나 불안장애, 섭식장애가 발생한다. 이러한 정서장애가 만성적으로 지속될 경우, 정상적인 관계형성이 어려우며 이러한 정서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게 되어 외상이 없는 사람에 비해서 미래의 기회를 상실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활동가로서의 치료자 치료자로서의 예방활동가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에게 이렇게 검증된 심리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은 전문가 윤리적으로는 당연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치료기법이 만능이 될 수는 없지만 평생을 고통받은 이들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치료를 받고 나서 재발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정부와 기관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치료전문가들이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심리치료를 하기 전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성, 성폭력 현실에 대한 또렷한 의식, 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인권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활동가로서의 치료자, 또 치료자로서의 예방활동가가 절실하다는 것이 나와 더불어 앞서 말한 포아 박사, 리네한 박사의 일치된 의견이며 이러한 치료자가 훌륭한 교육과 수련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