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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3 - 마음과 혼의 통전과 치유
  • 본 상담소 회원 가온
몸 이야기  |  연재 3/3

몸, 마음, 혼의 통전과 치유

본 상담소 회원 가온

몸, 마음, 혼

지난 여름 말레이시아 여행에서 나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곳 화교들이 보는 신문에 실린 ‘기공’에 관한 기사였는데요, 중국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지고 있는 기공은 인간을 ‘몸, 마음, 혼’으로 된 존재로 보고, 기공 수련을 통해 어떻게 이 세 부분이 하나가 되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지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한창 몸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했던 나는 유럽 중세 시대 기독교 수도원에서도 인간을 ‘몸, 마음, 영혼’으로 된 존재로 보고 이 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그들의 철학과 수도 방식이 중국의 ‘기공’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의 초의식 심리학자 켄 윌버는 심리학, 선불교, 철학을 종단하며 인간 의식을 연구한 결과, 인간에게는 육신의 눈, 마음의 눈, 관조의 눈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인간이 세 가지 영역, 즉 감각영역과 지적영역, 초월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 중 어느 한 영역에만 치우치게 되었을 때 빠지게 되는 위험과 이 세 영역이 궁극적으로 통합되어 있음을 방대한 연구를 통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동·서양의 과학과 종교의 지혜를 꿰뚫는 윌버의 책을 읽는 내내 떨림으로 발견의 환호를 질렀습니다.1 키라의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 몸의 의지는 마음(의식)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자체의 역사와 영역이 있으며, 이는 의식과 영혼 역시 몸과 일치하지 않는 자신의 영역과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깊은 차원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은 통전(통합)되어 있으며, 그것을 칸막이처럼 구분하여 마치 영혼은 몸 밖에 둥둥 떠 있고, 머리는 몸에 지시를 내리고 몸을 통제한다고 여기는 과학적, 합리적, 서구의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은 본연의 몸, 마음, 영혼의 통전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왜곡된 인지 방식을 우리에게 주입했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느껴야 할 때와 영혼으로 관조할 것조차 모두 머리(이성)로만 헤아리게 했다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감정)과 영혼을 인식하고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교육과 철학은 우리의 온전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지식과 과학의 함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통전성이 깨어질 때,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강제로 분리되어야 할 때, 나는 그것 자체가 엄청난 고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나 어린 아이가 엄마와 분리될 때 느끼는 분리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지요.

통전

〈작은 말하기〉에서, 그리고 수水님의 생존자 수기를 가슴을 치며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하게 되었습니다. 피해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금 피해를 받고 있는 내 ‘몸’과 의식을 분리시키고 영혼을 저 깊숙이 감추어야 했던 순간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피해 현장을 서둘러 빠져나오며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엄마 아빠를 대해야 했던 순간, 나는 내가 아니고, 내 몸은 내가 아니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그때, 나는 산산이 분해되어 더 이상 내 존재가 내 몸 안에 거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트라우마의 순간이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피해 입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분리하는 것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작은 말하기〉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찾아와서 낯선 그곳에서 그녀들이 입을 열었을 때, 그녀를 그곳으로 이끈 힘은 마음과 영혼이 그 몸의 기억을 보듬고자 하는 치유의 힘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밀어두고 밟아두었던 몸의 감각들이 살아나서 아프게, 아프게 떨리던 몸들, 눈빛들.

몸의 경험, 아직 몸의 반응으로 일어나는 생생한 감정들과 화해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과 영혼은 너무나 아프지만, 마치 고통의 손이 몸통으로 들어와 심장을 끄집어내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것이 온전한 치유의 과정이기 때문에 〈작은 말하기〉에 와서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하고, 떨리는 손으로 생존자 수기를 쓰는 것이리라 가늠했습니다.

살기 위한 몸부림,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생생하게 생을 살아내고자 하는 생명력, 그것이 그녀들의 입을 열고, 글을 쓰게 하고, 여기 지금 나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게 하는 그녀들의 힘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강했고, 그래서 그 아픔의 목을 낚아채 던져버리고 가볍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4월에 만난 그녀를 7월에 다시 보았을 때 얼굴에 생기와 빛이 돌고 있었습니다.

치유는 몸과 마음과 혼이 하나 되는 통전의 순간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상담소의 프로그램도 몸의 언어로 들어가 치유와 힘을 기르는 새로운 시도들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중 하나인 사이코드라마의 우리말이 마음-몸(맘)굿이었습니다.2 사이코드라마가 치유의 장인 것은 마음과 몸이 ‘맘’으로 통전하는 굿판이기 때문이며, 춤 세라피가 치유의 춤판인 것은 춤을 통해 몸, 마음, 영혼의 경계가 무장해체되어 우리 전 존재가 춤추기 때문이겠지요.3 제 5회 말하기 대회 〈언중유희〉는 치유의 큰 춤판이고 굿판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온전한 존재로 한판 울고, 놀아보는 신명의 축제, 치유의 제의.

다른 몸

여성주의 이론은 다른 몸과 다른 신학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여전히 다른 몸의 체험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이론, 그 지적혁명이 결코 고립된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듯이, 다른 몸의 체험과 다른 몸의 이야기 역시 집단성,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나 자신의 의지 부족도 크겠지만, 성차별적인 이성애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다른 몸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과 행위가 지닌 성차별적이고 이성애중심의 모순을 직면하며 내적인 긴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외로운 작업이며, 그것이 주는 큰 해방감만큼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른 몸 되기는 다른 몸 친구를 필요로 합니다. 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내가 다른 몸 친구들을 보고, 욕망하고, 따라하고, 함께 “으샤 으샤”함이 없을 때 나의 이론도, 몸 훈련도, 의지도 모두 제 자리에 정체되어 있습니다. ‘다른 몸’이 아닌 ‘마른 몸’을 원하는 내 안·밖의 요구들로부터 나는 다른 욕망을 꿈꾸고 싶습니다.

바람을 가로질러 뛰는 내 존재의 생생함을 느끼고, 숲 속의 고요와 푸르름 속에서 너와 나와 산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그 감격의 순간을 다시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나의 다른 몸 이야기가 당신의 다른 몸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들의 다른 몸 이야기, 다른 몸 체험. 나는 그것을 알고 싶기에 해보려 합니다. 나는 이제 출발선에 서 있고, 한 걸음 한 걸음 쉬다가 울다가 웃으며 가보려 합니다.

- 출발선 앞에서, 가온 드림

1 〈아이 투 아이: 감각의 눈, 이성의 눈, 관조의 눈〉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대원출판

2 나눔터 59호, 전 상담소 활동가 이산의 “사이코 드라마, 마음의 극장”을 참고하였습니다.

3 나눔터 57호, 전 상담소 활동가 모모의 “춤 세라피 워크숍 소개”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