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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범죄의 양형기준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 본 상담소 소장 이윤상
쟁점과 입장 _ 공소시효 / 양형기준

성폭력범죄의 양형기준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본 상담소 소장 이윤상

여러분은 재판부가 선고하는 범죄의 처벌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실형을 받고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든가, 형벌이 너무 가볍다던가, 다른 경우와 비교했을 때 형량이 너무 많거나 적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시죠?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사법부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을 하는 곳이 맞나,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판사들의 판단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이런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성폭력 피해사건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법적 구제절차를 선택한 생존자를 만나고 사건을 함께 진행하면서, 우리 상담소 활동가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분노도 여러분이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피해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그 피해의 무게에 맞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법적 구제의 핵심일진데, 어처구니없는 감형이유들이 잔뜩 나열된 판결문을 받아들고 나면, 뭣 하러 열심히 법정투쟁을 했나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운 경우도 자주 발생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2007년 대법원 양형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출범하였고, 지난 1년 반 동안 위원회는 우리나라 양형기준 모델을 선택하고, 작년 11월에 있었던 공청회에서는 뇌물죄, 성범죄, 살인죄의 양형기준안을 마련하여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를 가졌으며 지난 2월에는 배임횡령죄, 위증·무고죄, 강도죄에 관한 공청회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양형기준을 우선 마련하기로 한 6가지 범죄의 양형기준안에 관한 공청회가 마무리 되었고, 이제는 양형기준을 확정짓고 이를 실무에 반영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담은 매뉴얼을 마련하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성폭력범죄는 가해자에게 온정적 태도를 취하는 반면 피해자에게는 범죄를 유발한 책임을 묻는 기형적인 특징을 갖는 유일한 범죄입니다. 우리 상담소가 반성폭력 운동을 펼쳐온 지가 벌써 18년째이지요. 그동안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성폭력 예방을 위한 활동도 과거에 비해 무척 다양하고 활발해졌습니다. 이런 성과로 성폭력 범죄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많이 높아졌지요. 그런데도 성폭력범죄가 갖는 기형적인 특징은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판결문 몇 개만 살펴보아도 우리사회의 왜곡된 통념이 미치는 영향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폭력범죄의 감형이유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해자가 술을 마셨다는 것이 가해자가 ‘욕정에 못 이겨’ 범죄를 우발적으로 일으켰다는 이유로 감형사유가 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옷을 강제로 벗겨도, 피해자를 물색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끌고 가 강간하여도, 가해행위를 은폐하고자 핸드폰 기록을 삭제하려고 피해자의 핸드백을 절취하여도1, 의도되고 계획된 행위는 온데간데없고 술에 취하여 우발적으로 범행이 벌어졌으므로 잘못에 대한 책임이 적어진다는 것이죠. 언론에 보도되어 세간에 익히 알려져 있는 모 국회의원 여기자 성추행 사건은 2심에서 선고유예가 선고된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감형사유 중에 여러 명이 있는 장소에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고도의 고의성이 없다는 점이 거론되었습니다. 우선 둘만 있는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고도의 고의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심지어 술을 마셨으므로 우발적 범죄라고 보았으면서) 여러 명이 있다고 고의성이 현저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죠. 더욱 문제인 것은 호의적 성적 행동과 폭력적 성적 행동이 서로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일상화’된 폭력적 문화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사고해야 할 재판부가, 폭력이 이미 고도의 고의성 없이도 발생할 수 있을 만큼 일상화되었으므로 어느 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으니, 이들에게 성폭력범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범죄를 예방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러워집니다.

얼마 전에는 지적장애를 가진 10대 여성이 8년간 친지 4명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재판부가 ‘어려운 경제적 형편에도 부모를 대신해 피해자를 키워왔고, 앞으로도 피고인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며 일부 피고인들이 고령과 지병으로 수형 생활을 감내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는 기사를 읽고는 정말 분노를 금할 수 없었지요. 사실, 상담소에서 성폭력 사건을 접하다 보면 ‘나이가 많아서’, ‘공로가 커서’, ‘초범이어서’,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어서’ 등, 어이없는 집행유예의 사유는 정말 많이 보게 됩니다.

<뇌물/배임횡령/성폭력 범죄 바람직한 양형판단 기준을 말한다> 토론회 장면

성폭력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나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범죄를 처벌할 수 있게 되기는 하였지만, 법 제정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법과 제도가 정비되어도 사회의 편견이 바뀌지 않으면 법과 제도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성폭력 범죄는 편견과 통념이 미치는 영향이 큰 범죄이므로, 양형기준과 같은 잣대를 통해 편견과 통념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반드시 마련하여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상담소에서는 공청회의 토론자로 참석하거나 서면 의견서를 내는 등 다양한 통로를 이용하여 양형기준안에 대한 의견을 열심히 개진하였습니다. 음주가 감경사유로 작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 마구잡이 집행유예를 막기 위해서 고려배제 사유 등이 명시되어야 한다는 것, 합의와 공탁에 대한 의견에 이르기까지 양형기준안을 꼼꼼히 검토하고 여러 가지 의견을 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이나 편견 때문에 힘들게 고소하고 법적 절차를 밟고도 그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기 힘들게 되면, 피해는 계속 은폐되고 왜곡되기 쉽습니다. 결국 법을 만들어놓고, 그 법의 잘못된 운영 때문에 범죄를 예방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양형기준은 합리적인 처벌정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성폭력범죄의 경우 우리 사회의 통념과 싸운다는 점에서 또 다른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직한 양형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런데 통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우리가 처음으로 마련하는 양형기준이 여전히 음주-욕정-우발성의 악순환 고리에서 성폭력은 가해자의 책임보다는 남성의 욕정을 건드린 피해자를 문제 삼는 방식에서 헤맨다면, 모든 이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하고 보장하기 위한 우리의 오랜 활동이 바람직한 결실을 볼 날은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이 글은 본인이 작성한 공청회 토론문 “기준의 객관성-통념과 편견이 양형에 미치는 영향을 어찌할 것인가?”(2008.11.24)와 여성신문에 기고하였던 “성폭력 범죄 ‘양형 기준’ 바로 서야”(2008.10.16)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1 이상 사례는 <뇌물/배임횡령/성폭력 범죄, 바람직한 양형판단 기준을 말한다>(2008)에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검토한 성폭력 범죄 양형인자(이경환)’, ‘성폭력 범죄의 바람직한 양형 기준-통념과 편견을 넘어서(이윤상)’에 인용된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