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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 헌소 기각, 그러나 끝나지 않은
  • 본 상담소 전(前) 활동가 자주
쟁점과 입장 _ 공소시효 / 양형기준

공소시효 헌소 기각,
그러나 끝나지 않은

본 상담소 전(前) 활동가 자주

2008년 12월 26일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에 대한 헌법소원 결과가 발표되었다. 2006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공소시효 지난 피해자들을 모아 5명의 원고인단과 함께 한 헌법소원에 대한 결과가 만 2년만에야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기각’. 수사과정 상의 법리에 어긋나는 오류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 판결에 대한 주요 요지였다. 비록 위헌법률신청이 아니라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2년여 동안 기다린 결과치고는 너무 허무한 결과이자 이유가 아닐 수 없었다.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시작한 것은 2006년이었다. 당시 전화와 이메일 상담을 병행하던 상담소에는 오래전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상담이 일정비율을 차지하고 있었고 법적으로 구제를 받고자 해도 공소시효가 도과되어 법적 처벌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2004년부터 2006년 상반기까지의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 약 10%가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었는데 이는 결코 적은 수치라 할 수 없다. 또한 공소시효를 앞두고 있거나 공소시효는 아직 지나지 않았지만 (친고죄 조항의 고소기간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제기할 수 없는, 숨겨져 있는 사례까지 생각하면 성폭력 범죄의 ‘시간’의 문제는 몇몇 사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의 핵심적인 문제를 함의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성폭력 범죄가 여타의 다른 범죄와 달리, 피해자들이 바로 고소하지 않는다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건 직후 피해자가 겪을 공포와 당황감은 다른 범죄와 다르지 않을지라도, 자신이 겪은 것이 성폭력 피해인지 아닌지 자기 검열의 과정, 이것을 주변과 수사 기관에 이야기할 때의 두려움, 믿어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함, 그리고 주변에 알려질 경우 겪어야 할 수치감과 비난까지 많은 것을 감당할 준비와 결심이 서지 않고서는 고소란 쉬운 선택지가 아니다. 게다가 성폭력 피해의 70%가 아는 사람이라는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냥 묵인할 것인지, 개인적인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인지 등 ‘관계’까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공소시효가 지난 상담사례를 분석해보면, 고소를 할 수 없었던 이유들은 앞에 나열했던 이유들과 다르지 않다. 특히 공소시효 지난 성폭력 사례는 전체 성폭력에 비해 어린 시절에 입은 피해 사례가 절대적이고 가해자가 대부분 아는 사람, 그 중에서도 친족인 경우가 70%가 넘는다는 사실을 보면 왜 공소시효가 지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동 피해자의 경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성폭력이라고 인지하기 보다는 ‘불쾌한 장난’, ‘무언가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쉬우며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가해자의 협박, 또는 굳이 협박이 아니더라도 ‘왠지’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기 쉽다. 또한 용기를 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별일 아니라는 반응으로 덮어두고자 한다거나 심지어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우도 많아 피해자가 입을 다물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가해자가 경제적, 정서적 지원을 해야 하는 보호자의 위치라면 그만큼 피해자가 부담해야 할 위험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며 가족의 화목을 방해했다는 도덕적 비난까지 감수해야 한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경우 성인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를 중단하는 외국의 공소시효 제도를 우리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소시효가 지난 사례들 대부분이 아동성폭력과 친족성폭력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정확히 인지하고(아동성폭력) 가해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친족성폭력) 스스로 법적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사회적 제도로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형사법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소시효 제도에 있어서 성폭력만 예외적으로 ‘특별히’ 대우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원칙을 형식적인 것에서 실질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며 이와 같은 원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론, 성폭력을 침묵하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공소시효 제도의 개선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헌법소원 원고인단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례들이 항변하는 고통은 단지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데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고소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이 아니라,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잘못된 시선은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충분히 이야기하고픈 기본적인 발화의 욕구마저 상실하도록 하며 이는 법적 권리 뿐 아니라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차단한다. 성에 대한 터부와 여성의 성적 피해를 곧 몸에 대한 훼손이나 자아 손상으로 인식하는 문화는 이를 내면화한 피해자에서, 주변인에서, 수사기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피해자가 피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해답은 바로 그 과정 안에 담겨 있다. 피해자가 강요된 침묵의 벽을 깨고 나오는 순간, 주변인이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공감하는 순간, 수사기관이 편견 없이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순간, 피해자들은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발견하게 된다. 상담사례를 통해 공소시효의 문제를 짚었던 것은 공소시효 제도에 대한 합리적 개선을 통해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 뿐 아니라 공소시효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 사회의 성폭력 문제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들을 내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능의 법체계가 아닌, 법체계 안에서 포섭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함께 논의함으로써, 모든 피해자들은 피해사실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 그것이 늦었지만 ‘법’이라는 테두리에서 발화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결과 발표가 있던 날, 헌법재판소를 나오면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되뇌었다. 상담을 통해 만났던 피해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법원은 공소시효를 이유로 너무도 간단히 ‘끝’이라고 선언해버린 것은 아닐지. 들리지 않아도 피해자들의 침묵에 귀 기울일 수는 없었는가?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리플릿 공소시효 헌법소원 관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