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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수치심 대신 불쾌감을 느끼는, 숨는 것 대신 맞서 싸우는, 죽는 것 대신 해파리의 삶을 사는 피해자. 힘이 약한 것치고는 잘 싸우고 있는 해파리, 죽지도 않고 또 싸우러 왔다.

실제 나의 성격은 꽤나 포악했으나 그에 맞지 않게 신체조건이 열악했고, 외모와 인상은 순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친절에는 친절 그리고 시비에는 시비로 맞대응하며 자라나 2007년쯤 친구들은 나를, 받은 대로 갚아주는 '함무라비녀'라 칭했다. 사기당한 친구를 대신해 환불을 받아오거나, 만취해 행패를 부리는 부친을 집에서 내쫓거나, 새치기하는 얌체들을 붙잡아 저 멀리 보내기를 반복하며 살아온 내게 가장 큰 시련이란 고작 목소리 데시벨이 낮아 여러 번 말해야 하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닥친 시련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강철같던 '함무라비녀'는 강제추행을 당하는 2시간 내내 옹졸한 입술을 뻐끔거려 소리치지 못했는가. 그러고는 생각했다. 아, 내가 혼자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덩치만 컸더라면… 슬프게도 단신의 몸으로는 그 무엇도 제압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정신과 의사는 나에게 말했다. "인생에서 좋은 경험 하나 했다고 생각해" 나는 이 잊지 못할 좋은 경험이 그에게도 찾아오길 바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가해자를 직접 찾아가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다섯 손가락에 모두 반지를 끼고 가장 아픈 꿀밤을 때릴 수만 있다면 내 속이 다 풀릴 것만 같았다. 대체 내 고요했던 일상에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뺨을 찰싹 때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내가 싸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탄원서라는 이름의 활자뿐이었고 울분을 담은 활자 싸움은 마흔 장을 돌파했다. 이 정도의 양이면 가해자에게 사이버 꿀밤 정도는 한 대 먹였으리라 생각하며 1년이 넘는 시간을 사건에 몰두했다.

그럼에도 이 끈질긴 싸움은 다시 한 해를 넘기게 되었고 지독하게도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있으니 의사의 말대로 나는 좋은 경험을 한 것일까 또 한 번 답이 없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 있지 않았더라도 나는 용기 내 신고할 수 있었고 덩치가 작은 단신의 몸이더라도 작은 입술을 움직여 증인신문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제는 가해자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상상이 아닌, 민사 소송 합의금 일부를 기부하는 상상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싸움을 함께해 준 많은 여성들에게 승소를 선물하는 상상을 하며 잠에 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