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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하는 페미니스트들, 지리산에서의 한 걸음
  • 이미경 |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
상담소에는 유독 '산 타는 페미들'이 많습니다. 한 달에 한번, 주말산행을 하는 활동가들이 이번에는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습니다. 뜨겁고 열기 넘치는 종주기, 전해드립니다!

가을의 한가운데 우리는 지리산의 길목인 구례행 기차를 탔다. 3박 4일간의 산행을 위한 커다란 배낭에는 등산용 스틱과 음식, 옷가지뿐만 아니라, 각자 지닌 '지리산 종주'의 기대와 열망이 넘치게 담겨있었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모든 국립공원 대피소들이 문을 닫았다가 2022년 6월부터 개방되어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 상담소에서의 지리산 종주는 이번이 세 번째이다. 2007년 7월 말, 여성주의 자기방어 '다른 몸 되기' 프로젝트팀의 열여섯 여자들이 그 첫 물꼬를 텄다. 자기방어 프로젝트에 참여한 고등학생들과 활동가들이 용산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출발해 새벽 4시 40분경 성삼재부터 시작한 산행. 처음에는 "힘들어요. 더이상 한 발자국도 못 갈 것 같아요."라던 청소녀들은 신기하게도 갈수록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능선을 따라 하루에 10시간씩 사흘을 걸어 천왕봉 일출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이미 '다른 몸'이 되어있었던 감흥을 잊을 수 없다.

10년 뒤인 2017년 10월 초, 연휴를 맞아 상근활동가들과 구례에서 나고 자란 '지리산 날다람쥐' 회원으로 구성된 네명의 '지리산 바라기'들의 산행이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연하천을 지나 벽소령 가는 길에 밧줄을 타고 바위를 올라야 하는 코스도 있었다. 그 앞에서 비를 맞은 채 난감해하며 서 있던 여성 두 분을 만났다. 엉겁결에 "저희는 페미니스트입니다!"며 소개를 했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바위를 탔다. 이후 자연스럽게 우리팀은 4명에서 6명으로 불어났다. 다음 날 아침부터는 날이 개어 멋진 운해도 만나고 무사히 종주를 마쳤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서도 우리는 함께 산행을 즐기는 '산페미'가 되었다.

그리고 2022년 10월 중순에 상담소의 세 번째 지리산 종주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 산행에는 상근·비상근 활동가 일곱명이 뭉쳤다.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 차별금지법 제정,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등 긴급하게 대응해야 할 사안들이 쌓여있지만 다른 동료들의 배려와 응원 덕택에 예정대로 지리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7명 중 종주가 처음인 활동가도 있어 우리는 지난 5월부터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북한산에서 연습산행을 했다. 문수봉, 의상능선, 백운대 등을 오르며 조금씩 몸과 마음의 근력을 키워왔다.

지리산 종주는 늘 긴장과 설렘으로 가슴을 뛰게 한다. 이번에는 구례 읍내에서 하루를 묵고 새벽에 택시로 이동해 성삼재에서 간단한 몸풀기 체조로 산행을 시작했다.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는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섬진강 위로 퍼져있는 운무는 산과 들판을 순식간에 거대한 바다와 섬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올랐고,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천왕봉은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임걸령 삼거리, 노루목, 삼도봉, 화개재를 지나 12시경 연하천에 도착했다. 연하천 대피소는 공사 중이었지만, 물이 있고 데크도 개방해줘서 우리는 점심식사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겨우 1개의 라면을 끓이면 알맞을 코펠에 라면 3개를 넣고 끓이는 신공에 감탄하고 그 맛에 매료된 우리는 행복했다.

저녁에는 벽소령 대피소에서 햇반을 사 짜장밥을 만들어 먹으며 미리 재료들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준비해준 동료들의 따뜻한 손길과 마음에 감사했다. 지나던 등산인들이 여성 7명이 함께하는 것이 생경한지 "어떤 관계냐?"고 물어 동료들이라고 했더니 정말 부러워했다. 산에서는 물이 귀해 설거지를 물로 하지 않고, 뜨거운 물 한 컵을 끓여 돌아가며 그릇들을 헹군 뒤 티슈로 잘 닦아내어 정리했다. 모든 쓰레기는 되가져오기 위해 배낭 속에 차곡차곡 담겼다.

다음 날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석평전을 비롯해 촛대봉, 연하봉 등 굽이굽이 멋진 절경들을 감상하며 장터목까지 우리 일행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지리산의 넉넉한 품에서 대자연과 호흡하며 한 걸음씩 내딛는 중이었다. 아래로 보이는 산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산맥을 이루며 전라남·북도, 경상남도를 잇고 있었다.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제 천왕봉은 불과 1시간 30분 거리에 있고, 이틀을 꼬박 걸어온 길 뒤쪽으로 아득하게 노고단이 보였다. 와글와글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좁은 숙소의 2층 마루바닥에 7명이 줄지어 누워 몸의 긴장을 푸는 요가도 하고 파스도 서로 부쳐주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마지막 날은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천왕봉을 향했다. 온통 깜깜한 산길을 앞·뒷사람의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걸었다. 마침내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어린 일출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검붉은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어느새 주홍빛으로 변하면서 저 멀리 동해에서 태양이 솟아 올라왔다. 그 장엄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둠 속의 산하가 빛을 만나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우리에게 지난 3일동안 길을 열어주고 멋진 일출까지 보게 해준 지리산에 무한 감사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7명 모두 안전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음에 서로에게 마음 깊이 고마움을 나눴다. 모두들 준비과정부터 매끼 식사 준비며 짐 분배 등 기꺼이 자기 역할을 했고, 부족함이 보이면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채워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주었기에 가능했던 여정이었다. 이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오름을 함께 체감했다. 이 뿌듯함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에 소중한 자양분이 되리라. 지리산 종주에서 얻은 몸과 마음의 힘을 한라산, 설악산 등으로 계속 이어가며 페미니스트로서 늘 새로운 도전과 상상을 하고 변화를 만들어가리라!

산행 후기

"진짜 페미니스트들이랑 산은, 산행은 잘 맞는 거구나 싶어요. 알맞게 식재로와 간식을 고르고 준비하고 쓰레기를 되가져 오고, 양념까지 남김없이 먹고 몸의 순환을 해뜨기와 해지기에 맞추고, 식물들 속에서 걷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이런 거 페미들이 젤 잘할 수 있는 거! 우리가 걸어온 성삼재부터 천왕봉까지의 길이 우리 몸에 들어왔고, 이제 다른 무언가가 되어도 이상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구들도 너 같이 만성피로 인간이 무슨 지리산 종주냐고 그러고 저도 자신이 없었어서 출발 직전까지도 계속 가는게 맞을까 고민했었는데요ㅠㅠ. 종주 잘 마치고 목욕탕 뒤풀이까지 끝낼 수 있어 정말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예요."

"지리산 종주를 해낼 수 있을지 계속 의문이었는데 베테랑 산악인의 도움으로 종주 할 수 있었어요!!! 지리산 종주를 해내니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막 뿜어나와요.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먹고 덩싸고 걷고 가깝게 붙어 사람으로 진득하게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어 너무 감사합니다. 걸어서 지리산 만큼 높은 곳, 종주만큼 긴 거리 다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여러분 덕분에 경치도 즐기고, 사진도 남기고, 안전하게 무사히 지리산을 다녀올 수 있었어요. 한 분 한 분 나열하기 어려울만큼 넘넘 감사해요. 살면서 갚아나갈게요. 여러분이 없었으면 전 지금 하산했을 것^^."

"무엇이 우리를 지리산행으로 이끌었을까를 생각해보면 페미니스트로서 내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을 견디며 나의 한계까지 인정하고 사랑하며 자연과 호흡하고픈, 그리고 더 멋지고 의미있게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고픈 열망? 산페미 화이팅!"

"여운이 가시지 않은 행복감에, 성취감에 취해 아름다운 날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