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17일, 시리즈 집담회 〈성폭력의 법적 해결 백래시에 맞서는 로우(LAW)킥〉이 3차에 걸쳐 마무리되었습니다. 시리즈 집담회 로우(LAW)킥은 성폭력피해생존자들이 법적 해결과정에서 경험하는 제도적 한계와 법적 쟁점을 나누고, 보다 나은 지원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세 번의 로우(LAW)킥을 날리기 전에, 상담소 활동가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성폭력피해생존자는 치유와 피해 회복을 위해 다양한 해결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성폭력 관련 법률 제·개정 운동과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
초기 한국 여성운동의 주된 의제는 제도적으로 여성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열심히 투쟁한 결과 가장 도드라진 성취는 젠더폭력과 관련된 법률을 새로 만들거나 고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특히 반성폭력운동사에서 성폭력 관련법의 제·개정은 90년대 초 성폭력특별법제정추진위원회부터 최근 강간죄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핵심의제입니다.
2018년을 전후로 미투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많은 여성들은 사회시스템과 문화, 일상이 변화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우리 사회의 행동 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성폭력 사건이 일어난 환경이나 조건, 구조를 조명하는 대신 당사자들의 행보에 집중함으로써 권력과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 간의 분쟁으로만 다루기도 했습니다. 재판 중인 성폭력 사건은 어느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벼운 가십처럼 여겨졌습니다. 기자들은 재판에서 알게 되는 민감한 정보나 피해자를 비난하기 위해 올려진 개인 SNS의 내용들을 가감없이 보도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을 지켜보며 차가운 시선으로 피해자를 비난했습니다. 법적으로 피해가 인정되더라도 피해자들은 여전히 의심받기 일쑤였습니다.
사법절차 외에도 사건 해결방법은 많다
앞서 언급한 이유들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성폭력 사건의 사법적 해결은 많은 피해자와 피해자 주변인들에게 유일한 길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2021년 한해 동안 진행한 성폭력상담 1322건 중, 법률지원을 요청한 상담은 총 772건(중복)으로 전체 상담의 58.4%에 달합니다. 최근 3개년 동안의 상담 경향을 보면 연도별로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절반 이상의 상담이 법적 지원 요청하는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형사사법절차를 통해 피해를 인정받고, 공권력으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 이후 치유와 일상회복을 하는 데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법적 지원 외에 피해생존자들이 상담소에 가장 많이 요청하는 것은 의료지원입니다. 의료기관이나 심리상담전문기관에서 본인에게 필요한 상담이나 약물을 제공받아 빠른 치유와 회복을 꾀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여성주의적으로 재해석하여 피해자로서 역량강화를 할 수 있는 상담을 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활동가들과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종종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많은 이들에게 알려 경각심을 일으키고, 유사한 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인식을 전환시키거나 제도를 바꾸어 내는 공론화도 가능합니다. 사법 절차는 아니지만 가해자나 피해자가 속한 기업이나 조직 혹은 공동체 내부 규정에 의거하여 절차를 진행하고 가해자에게 적절한 징계가 내려지도록 하는 방법도 있으며, 국가인권위원회나 노동청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피해를 인정받고, 관련 조직이나 회사 대표 등에게 책임을 지도록 강제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가해자와의 직접적 소통이나 내용증명 발송 등으로 본인의 피해 상황을 알려 사과를 받거나 금전적 합의를 하는 등 피해자 본인이 필요한 것을 직접 요구하고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위에 나열한 방법 외에도 피해자가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적절한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해결은 여전히 피해생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효한 대안 중 하나입니다. 법적 해결을 염두에 둔 분들을 위해 최근 성폭력 재판에서의 주요한 백래시 흐름을 짚은 로우(LAW)킥 집담회 3회차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성폭력의 법적 해결 백래시에 맞서는 로우(LAW)킥
첫 번째 주제는 〈피해자 진료기록 재감정, 이대로 괜찮은가?〉였습니다. 피해자가 제출한 진료기록의 증거능력 상실을 위해서 혹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기 위해 피해자의 진료기록을 '감정'해야한다고 요구하는 가해자들, 그리고 피해자 직접 진료 없이 서면만으로 '감정'하는 상황의 부적절성 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래시에 맞서는 전략들을 나누어 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두 번째는 〈성폭력 피고인의 방어권 남용,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피고인들의 무분별한 사실조회촉탁으로 인해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보호되지 못하거나, 법원에 제출된 피해자의 의료기록을 개인 SNS에 게시하여 개인정보 유출 피해가 발생하는 등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라는 명목으로 스스로의 방어가 아닌 피해자를 향한 또 다른 공격으로 이어지는 사례들을 짚어보았습니다.
세 번째 집담회 주제는 〈성폭력 피해자, 피의자가 되다〉로 성폭력 피해자가 졸지에 피의자로 뒤바뀌는 역고소의 실태를 파헤쳐 보았습니다. 상담통계 분석을 통해 역고소의 유형을 살펴보기도 하고, 수사 기관 인지 무고 사례를 톺아보면서 역고소 피소시 대응 전략 등을 공유하고 더 논의해보는 기회도 마련하였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회복
사법절차를 포함하여 다양한 해결 방법을 알고,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로 사법절차를 선택한다면 사건 진행상황과 일정하게 심리적 거리를 두면서 피해자 자신의 일상생활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조건과 상황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법절차는 기본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국가기관에 자신의 피해를 증명해보여야 하는 역할을 요구받기 때문에, 때때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게 되기 쉽습니다. 특히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법적절차는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길고 울퉁불퉁한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버겁고 힘든 과정이 될 것입니다.
성폭력 사건의 형사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대부분 피해자의 진술인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가해자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여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전략을 자주 씁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들은 크게 상처받습니다. 심한 경우 2차 피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수사재판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당면하는 어려움들은 세심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피해자의 치유와 일상회복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사법절차 과정에서도 피해자를 괴롭히거나 함부로 의심하거나 피의자에게 과도한 권리가 치우친다면 제대로 된 판단은 어려울 것이고, 피해자의 치유회복도 요원해질 것입니다. 앞으로도 피해생존자들이 정당하게 피해를 인정받고,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성폭력 사건은 법적 절차뿐 아니라 다양한 해결 방안과 전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피해자의 치유와 일상회복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상상하고 발맞추어 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