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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들의 시간 : 2020 성폭력전문상담원 심화교육 후기
  • 감이_여성주의 상담팀 활동가
2020 성폭력전문상담원 심화교육 후기

등대지기들의 시간

2020 성폭력전문상담원 심화교육 <조직 내 성폭력 사건지원자 역량강화교육: 흔들리던 성냥불이 우직한 등대가 되기 위해>가 8월 17일(월)부터 21일(금)까지 닷새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담당자인 감이와 교육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

감이 | 여성주의 상담팀 활동가

저는 대학생 때 총여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학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교육과 가해자 사과문 작성을 모니터링 하는 역할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막 페미니즘을 알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언어의 세계에 허우적 대고 있었고, 동료들과 함께한 세미나가 성폭력에 대한 경험과 지식의 전부였을 때였습니다. 그 때는 성폭력 사건 개념화, 피해경험에 대한 공감, 가해자 다루기 등 조직 내 사건 해결 과정에서 사건지원자로서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에 참 버겁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부대낌을 나눌 수가 없었어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몇 겹씩 껴입고서 괴로워하다가 저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그 일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저는 조직 내 사건지원자들이 기대하는 상담소의 역할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이번 심화교육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 점처럼 흩어져서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조직 내 사건지원자들에게는 연결망이 필요하고, 그 구심점 혹은 만남의 장이 바로 상담소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건지원과 관련해서 많은 노하우와 자원을 가진 상담소에서 좋은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각 조직에서 외롭게 분투하고 있는 사건지원자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원자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 서로가 가진 경험과 노하우,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장도 너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심화교육은 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의 책임연구원과 함께 커리큘럼 기획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성폭력 사건지원자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 한계를 짚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고,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의 특성과 조직문화, 규정 등을 점검하는 워크숍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여성주의상담과 피해자리더십에 대해 공부도 하고, 가해자의 특성에 대해 다뤄보는 시간도 마련했어요. 사건지원의 지도를 그려보며, 관련한 법률도 공부했습니다. 강의 내용 뿐 아니라 교육의 구성도 강의 대 워크숍을 1:1로 하고, 각 강의에서도 토론과 강의의 비율을 1:2로 구성해서 교육 참가자들의 고민과 의견, 질문이 활발하게 환류될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교육 참가자들끼리도 최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경험을 직접 나눌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코로나 시대의 기념 사진
코로나 시대의 기념 사진

그런데 코로나19가 급격한 확산세를 보이며 위세를 떨치던 때라 첫날을 제외하고 나머지 4일은 온라인을 통해 진행해야 했습니다. 8.15에 대규모 집단감염을 일으킨 사람들이 정말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교육은 진행해야 했기에 온라인으로 최대한 효율적인 진행을 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처음에는 실수도 많고 우왕좌왕했지요. 온라인 강의실에 접속하는 것부터 소리가 안 들리거나, 소음이 심해서 당황하기도 하고요. 회의실 시간 설정을 잘못해서 강의가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에 닫혀버리기도 했습니다. 등 뒤에 진땀이 흥건해서 서늘할 정도였어요.

이렇게 어렵게 진행된 교육이었지만, 교육에 참가한 분들의 면면은 정말 멋지고 빛이 나서 컴퓨터 모니터를 뚫고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번 교육의 부제는 "흔들리던 성냥불이 우직한 등대가 되기 위해"였는데, 등대처럼 우직하게 성폭력피해생존자들을 만나고 지원해 온 사건지원자들을 실제로 만났던 것이죠. 이번 교육을 통해 서로의 고민을 진지하고 다정하게 듣고 공감해주는 사건지원자 동료들을 만나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지지체계가 되어줄 수 있는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갈 수 있길 기원합니다. 교육 내용에 대해 좀 더 궁금하신 분은 상담소 블로그 후기을 참고해주세요.

이 글을 마치기 전에, 교육 수료식 중 교육참가자들이 직접 작성한 "등대지기에게 보내는 편지(Messages from the LightKeepers)" 중 일부를 공유합니다. 어쩌면 여전히 외롭게 조직 내에서 사건을 지원하는 분들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지면을 빌려 심화교육에 함께 해주셨던 교육참가자들과 강사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등대지기에게 보내는 편지 (Messages from the LightKeepers)

교육을 들으면서 공동체적 해결, 조직 내 해결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말에는 여러분 각자가 속해있는 그 하나의 공동체의 개별적인 문제가 결국에는 그 사회, 세상을 바꾸는 것이 된다는 전제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제가, 그리고 제 동료와 친구들이 겪는 문제가 어떻게 재발되지 않고, 세상이 이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변화하려고 시도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가해자 개인에 대한 문제제기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세상 전체가 바뀔 수 있도록, 피해자 관점의 이야기를 어떻게 외부로 확산하고, 공론장에서 논의할 수 있을지, 효과적인 방법을 같이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친구들과 동료들과 연대인들과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는 토대를 탄탄하게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 유선

한계는 부끄러운 것, 모자란 것이 아니다.
내 한계를 설정하고 타인을 만나자.
어렵다면 솔직히 털어놓을
지지체계, 조력자를 만들자.
세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exercise)하고
나를 조금씩 넓혀서
잘 돕기 위한 상상력을 키우자.
조급해하지 말고 자책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충분히 잘하고 있을 것이다.
지칠 때면 잠시 쉬자. 그리고
내가 왜 이 일에 뛰어들게 됐는지
나의 목적을 다시 들여다보자.

— 수희

사건의 옆, 피해자의 곁을 지키느라 고생 많았어.
대한민국 전체가 엉망이라고 퉁치고 싶었는데
교육받으면서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젠지
짚어낼 수 있어서 의미가 깊었어.
다음에는 더 평등한 관계를 맺길,
피해자에게 통제력과 신뢰감을 주길,
피해자의 생존을 응원하길 바랄게.
몇 년이냐 진짜. 고생많았어.

— 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