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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며
  • 앎_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낙태죄 헌법불합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며

앎 |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을 발족한 지 2년, "3년 내로 낙태죄 폐지하자" 막연했던 다짐을 실현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과 앞으로 이어갈 활동에 대한 의지를 회원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2019년 4월 11일은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의 위헌성을 인정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형법 제정 66년 만에, 2012년 합헌 결정 7년 만에 드디어 '낙태죄'가 폐지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번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국회와 정부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제도 개정을 하여야 합니다. 그동안 여성들이 "여성도 사람이다! 기본권을 보장하라! 낙태죄를 폐지하라!"라고 외치고 싸워온 성과입니다.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 운동이 시작된 배경

'낙태죄'는 원래 1953년 대한민국 형법 제정 당시부터 있었지만, 국가가 경제발전을 명목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던 시절에는 사실상 사문화된 법이었습니다.

오히려 국가는 암암리에 임신중지를 권장하고 정부 주도하에 '낙태 버스'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에 국가가 '저출산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낙태죄'는 갑자기 여성의 삶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부터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는 반대세력이 나타나고, 임신중지를 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강화된 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2010년에는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임신중지 시술 병원 고발 사태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병원들이 임신중지 시술을 거부하거나 터무니없는 비용을 요구하였고, 한편으로는 가짜 유산유도제가 유통되고 원정 임신중지가 음성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서 신뢰할 수 없는 정보들 속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시술 병원을 소개해주겠다는 가짜 브로커에게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도 있었습니다. 일부 남성들은 여성을 협박하거나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형법상 '낙태죄'를 악용하기도 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2012년 합헌 결정을 선고한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임신중지 수술을 받던 도중 10대 여성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임신출산결정권을위한네트워크'에 함께 하며 '낙태죄' 폐지와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습니다. 2012년도에는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와 『성폭력 피해로 인한 인공임신중절수술 지원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를 진행하였고, "예외적 사유 안에서의 지원 기준을 만들고 제도화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에 해당하지 않는 유형의 피해자 및 여성 일반의 권리를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 인공유산의 합법화 없이는 성폭력 피해자의 인공유산과 관련된 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따라서 낙태죄를 비범죄화하고 인공유산이 합법화되어야만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라는 연구 결과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2016년에는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지 시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고 가중처벌하는 의료법 개정안 입법을 예고하였습니다. 분노한 여성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라고 외치며 <검은 시위>를 진행하였습니다. 2016년 폴란드에서 20만 명 이상의 여성이 참여한 임신중지금지법안 반대 집회 <BLACK PROTEST>의 한국 버전이었습니다. 이때 검은 시위를 주최했던 여성단체들이 2017년도에 다시 모여서 구성한 연대체가 바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하 '모낙폐')'입니다. 이와 별개로, 익명의 여성들은 <BWAVE>를 구성하여 2019년 3월까지 총 19차에 걸친 임신중단 합법화 촉구 시위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를 외치다

모낙폐는 2017년 9월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을 맞아 발족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연대체 구성을 논의하는 초동 모임에 참여했을 때, 저는 입사한 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신입 활동가였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반드시 낙태죄 폐지하자!"라고 결의할 때는 가슴이 뛰었지만, 동료활동가들이 '앞으로 3년'의 활동 전망을 공유할 때는 까마득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활동가로서 성폭력 피해자의 관점으로 '낙태죄' 폐지의 필요성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거웠습니다.

초동 모임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었던 것은 임신중지에 대한 담론을 어떻게 넓힐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결정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국가가 생명을 선별하고 인구를 통제해 온 역사, 모든 여성/사람의 평등권, 성과 재생산 권리, 의료 서비스 접근권, 우생학적 모자보건법의 문제 등에 대해 담론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라는 슬로건은 나이, 지역, 국적,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 혼인 여부, 경제 상황, 질병이나 장애 여부 등에 따라 다양한 위치와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의 성과 재생산 권리를 보장하고, 모두의 삶과 결정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지향을 담아 결정되었습니다.

활동 초기에 모낙폐는 임신중지와 관련한 다양한 당사자의 경험을 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퍼포먼스, 기자회견, 대중집회 등을 통해 중년 여성, 장애 여성, 청소년, 기혼/비혼 여성, 노동자, 성폭력 피해자, HIV 감염인, 성판매 여성 등 각각 다른 위치와 상황에 놓여 있는 당사자들의 발언을 직접 듣거나 대독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자유발언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포궁이 있고 임신이 가능하지만 스스로 여성이라고 정의하지 않는 당사자였습니다. '낙태죄' 폐지 담론이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성별 이분법 안에서만 논의되거나 이성애중심적인 서사로만 상상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실감했습니다. 침묵을 깨고 경험을 나눠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했습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는 모두가 싸워서 얻어낸 결과

2017년 가을에는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촉구하는 국민청원에 235,372명이 서명하였습니다. 청와대는 현행 법제가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는 문제점이 있고, 남성과 사회의 책임은 빠져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235,372명의 구체적인 요구에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은 다시 거리로 나와 <검은 시위>를 벌였습니다.

2018년 5월 24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소원 공개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간 모낙폐는 헌법재판소에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각종 기자회견, 단위별 릴레이 의견서 제출, 시민 서명운동 등을 지속하였고, 대중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활동으로 <269명이 만드는 형법 269조 삭제 퍼포먼스>,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 퍼레이드, 헌법재판소 앞 <낙태죄 위헌 결정 촉구 1인 시위> 등을 진행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네덜란드 활동가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레베카 곰버츠를 국내에 초청하여 대중강연회, 국회토론회 등을 열고, 아르헨티나 임신중지 합법화 법 상원 통과를 위한 국제행동에 동참하는 등 전 세계의 재생산권 운동과 연대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상반기에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두고 재판부에 마지막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여론을 조성해야 했습니다. 예상되는 선고 결과별 시나리오와 대응 전략을 논의하고, 선고 이후 국회와 정부에 요구할 입법과제를 구체화하였습니다. 2019년 3월 30일에 진행되었던 집회 <카운트다운: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에서는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전면 비범죄화 ▶포괄적 성교육과 피임 접근성 확대 ▶유산유도제 도입을 통한 여성건강권 보장 ▶우생학적 모자보건법 전면 개정 ▶낙인과 처벌 없는 재생산권 보장이라는 다섯 가지 주요 요구를 선언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예정된 2019년 4월 11일 오전 9시부터 선고 직전까지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각계 릴레이 기자회견>이 진행되었습니다. 청년학생, 종교계, 청소년, 성과재생산포럼, 교수연구자, 장애계, 진보정당, 의료계 등의 기자회견이 순서대로 이어졌습니다. 선고 직후에는 모낙폐의 기자회견이 진행되었고, 선고 결과에 대한 모낙폐의 입장 발표와 변호인단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같은 날 저녁에는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환영 집회 <더이상 낙태죄는 없다>가 열렸습니다. 기쁨과 희망, 성취감으로 환한 웃음을 띤 참여자 1,000여 명이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춤을 추었습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순간, 앎과 오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순간, 앎과 오매

선고 다음 날인 2019년 4월 12일에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헌법불합치 결정문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과 여러 쟁점에 대한 의견을 밝혔습니다. 모낙폐는 임신중지를 전면 비범죄화하여야 하고, 어떤 형태로든 주수나 사유 제한을 두어 국가의 '허락'이나 '처벌'로 여성의 삶을 통제하는 입법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앞으로 '낙태죄' 폐지 운동의 과제

이번 헌법불합치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의 위헌성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의가 있지만, 여전히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결정권'이라는 한정된 구도 안에서 논의를 그쳤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국회와 정부는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입법 한계와 입법 방향을 참고하되, 결정문에서 논의되지 않은 더 넓고 다양한 층위의 담론(건강권, 평등권, 신체의 완전성에 관한 권리, 성과 재생산 권리 등)을 고려하여 입법 논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형법상 '낙태죄'를 폐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당사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포괄적인 법·제도·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설령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다 하더라도 상담 의무, 숙려기간 등을 제도화거나 의료인의 '신념에 의한 거부'를 인정한다면 임신중지를 하기 위한 진입장벽은 높아지고 당사자의 권리는 사실상 제한될 것입니다. 공교육에서 포괄적 성교육을 시행하고, 임신중지를 한 당사자에게 피임 교육을 제공하는 등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현재 모낙폐는 국회와 정부를 모니터링하고, 관련 입법이 '여성의 권리 보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19년 6월 18일에는 열린 토론회 <낙태죄 폐지, 2 ROUND>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며 보건의료, 노동, 성교육, 가족제도 등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살펴보는 토론회였습니다. 그동안 낙태죄 폐지를 외쳐온 여성들의 목소리를 기만하는 법이 아니라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법 개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지켜보고 응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