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후기] 유산유도제 도입 101번째 국가를 향해 ‘9.28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 기념 퍼포먼스
2026년 9월 28일 저녁 7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는
<유산유도제 도입 101번째 국가를 향해 ‘9.28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 기념 퍼포먼스>를 진행했습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7년만에 유산유도제 도입이 결정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을 외쳤던 페미니스트들이 그동안 청원, 진정, 집회 등으로 경험을 이야기해온 성과이지요! 마침내 진전을 이뤄냈지만 앞으로 이뤄낼 것이 남아 있습니다.
더 나은 변화를 위해 오늘 101명을 넘어 120여명이 모였는데요, 유산유도제의 '제대로 된' 도입을 위한 현장발언과 퍼포먼스를 전합니다.

[발언]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앎
저는 2017년부터 2022년까지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에서 집행위원 및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선고되었을 때 다같이 환호했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때도 모낙폐는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동시에 유산유도제 도입을 통해 재생산권과 건강권을 보장할 것을 촉구해 왔습니다.
2020년 12월 31일 '낙태죄'가 마침내 효력을 상실했을 때 보건복지부가 유산유도제를 신속하게 도입하겠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했던 것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로부터 어느새 5년 10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연대활동 담당자가 바뀌었고, 저는 여성주의상담팀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전화상담을 하다 보면, 여전히 '임신중지를 해주겠다는 병원이 없다', '소파술 말고 약물로도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보호자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들었다' 등의 사연을 듣게 됩니다. '낙태죄'는 폐지되었지만, 재생산권과 건강권은 여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16일 정부가 유산유도제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고 들었습니다.
미프진 도입 자체는 정말로 반갑고 환영할 만한 소식이지만, 다양한 요구사항과 근거자료를 제시하며 그토록 기다려왔던 입장에서 보면 아쉬움이 너무나도 큽니다.
오늘 제가 입고 온 옷은 2019년 아일랜드에 방문했을 때 선물받은 옷입니다.
아일랜드는 2018년 5월 26일 국민투표를 통해 수정헌법에서 '낙태죄' 관련 조항을 폐지한 나라입니다. 이 옷은 해당 국민투표를 앞두고 아일랜드의 활동가들이 찬성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을 펼치며 입었던 옷이라고 해요.
아일랜드는 국민투표 이후 불과 반년 만인 2019년 1월 1일에 관련 법을 시행했습니다. 비록 임신중지를 전면 비범죄화하지 않는 등 문제점이 많은 법이었지만, 빠른 시일 내로 유산유도제를 적극적·긍정적으로 추진했다는 점, 12주까지 유산유도제 처방이 가능한데 첫번째 약물은 의사 감독 하에 복용하되 두번째 약물은 집에서 복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점에서 새삼 한국과 대비되는 걸 생각하며 이 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유산유도제 처방을 임신 9주 이하로, '원내 처방 원내 조제' 원칙으로 제한하는 것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가이드는 물론 이미 안전하게 유산유도제를 사용하고 있는 전 세계 100여 개국의 국제 사례와도 어긋납니다.
WHO 가이드에 따라 임신 12주까지 처방과 자가 복용을 허용하고, 그 이후에도 임신 전 기간에 걸쳐 의료인의 조력을 받으면 사용 가능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오랫동안 요구해왔듯이, 유산유도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남성, 보호자 등 제3자의 동의 없이도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확대해야 합니다.
구호를 외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다! 더는 꾸물거리지 말고
유산유도제 도입으로 재생산권과 건강권을 보장하라!

[발언] 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김도미
10년 전, 검은 옷을 입고 보신각에 모였던 이맘때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외쳤습니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그로부터 3년이 걸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습니다. 그때는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내 삶의 맥락 속에서 책임지는 방법을 숙고하고, 결정할 권리가 이토록 멀리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저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경험을 나누어 가진 분들이 이 자리에 있다면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불법을 면했을 뿐, 초조하고 어려운 시간을 견뎠을 당신에게 말입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음식을 드시고 따뜻하게 쉬셨습니까. 검은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당신의 곁에, 무엇이든 다 털어놓아도 괜찮고 위안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제가 임신을 확인한 시기는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입니다. 암이 의심돼, 몇 주에 걸쳐 정밀검사를 받던 중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산유도제는 없었습니다. 처방받을 수 있는 약은 임신중지가 될 확률이 비교적 낮았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친구를 통해 겨우 병원을 찾았습니다. 간호사는 저를 배려해,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복약지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저는 저의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고 낙인까지 걷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약은 듣지 않았습니다. 수술할 병원을 찾으려고 전화를 돌릴 때, 저는 유산 중인 것 같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약을 처방해 준 의사가 곤란해질까 우려했습니다. 수술 중 문제가 생겼을 때 제가 검사 중인 상급병원으로 연계될 수 있을지 확인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암 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도 저는 유산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그 병원은 종교적 이유로 피임시술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간신히 임신중지를 마쳤을 뿐, 이후에 필요한 의료적 사회적 돌봄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나라의 사례를 접하며 알게되었습니다. 제가 감지덕지하면서 받았던 처치는 안전한 임신중지에 필요한 과정의 극히 일부였고, 그마저도 불완전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한국 정부도 유산유도제를 도입한다고 합니다. 환영하지만 온전히 환영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조건 병원 안에서만 약을 먹고 관찰받게 한다면, 의료기관에 제 때 갈 수 없는 사람, 먼 곳에 사는 사람, 하루가 급한 사람이 시기를 놓칩니다. 병원 앞에서, 의료진 앞에서 매 단계 머뭇거리게 할 수록 제 때를 놓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높은 문턱은, 아픈 사람에게는 더 높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한시가 급한 사람들은 삼엄한 시스템 앞에서 하지 않아도 될 거짓말을 하게 될 겁니다.
원내조제, 원내투약 방침을 철회하십시오.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정확한 정보를 누구나 쉽게 찾고 이해할 수 있게 하십시오.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도 안심할 수 있도록 의료기관 사이의 연계 체계를 만드십시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끝이 아니었듯, 유산유도제 도입도 끝이 아닙니다. 접근권이 곧 건강권입니다. 임신중지가 온전하고 안전한 우리의 권리가 될 때까지,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발언]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활동가 나영
저는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나영입니다.
저는 오늘 경과보고를 하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느 시점부터 이 경과를 말해야 할까요. 정부의 유산유도제 승인 계획 발표를 보고 많은 언론에서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7년만이라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모임넷 역시 그 점을 강조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7년, 그에 따라 형법 ‘낙태죄’ 조항의 법적 효력이 완전히 끝나고 유산유도제의 승인 신청이 시작된지 5년만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비범죄화가 이미 새로운 기준이며, 법 개정 없이도 유산유도제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하고 요구해 왔습니다. 입법 공백이 아니라 정부, 복지부, 식약처의 책임방기로 근거도 없이 약 승인이 한없이 미뤄지는 동안 우리는 복지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식약처의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 참석하여 과학적 근거와 각국의 현황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도 하고,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대한민국 정부의 이행보고 심의에도 참석하여 정부의 책임 방기를 알리기도 했습니다. 매번 수 페이지에서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자료와 우리의 요구를 정부와 국회에 보내고 면담이나 간담회, 토론회가 있을 때마다 제출했습니다. 이번 정부의 발표는 그 시간 끝에 겨우 시작된 첫걸음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좀 더 앞당겨서 볼 수도 있습니다.
2019년이 아닌 2017년 9월 30일입니다.
이 날은 청와대에 국민청원 게시판에 미프진 도입을 요구하는 청원글이 처음으로 올라온 날입니다.
이 청원에는 한 달만에 235,372명이 참여했고, 당시 문재인 정부의 조국 민정수석은 위헌 소송이 진행 중인 것에만 책임을 미루고, “모든 부모에게 출산이 기쁨이 되고, 아이에게 축복이 되는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동문서답으로 입장 발표를 마무리했습니다.
이 청원은 왜 올라오게 되었을까요. 청원글을 보면 이 때도 이미 온라인에서 가짜약을 팔고 사기를 치는 등의 문제를 유산유도제의 공식 승인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중국산 낙태약이 들어오기 시작한 게,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낙태죄’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하고, 진오비 등 프로라이프 의사들이 나서서 시술 병원 고발을 시작해서 상황이 매우 심각해진 때부터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갈 수 있는 병원을 찾지 못해 임신중지를 하러 해외로 가고, 브로커가 판치고, 그러다 한 여성의 임신중지를 도운 조산사가 상대 남성에게 보복성으로 고발을 당해 그 사건이 헌법재판소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2012년 헌법재판소는 합헌 결정을 내렸죠. 온라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프진 판매상과 브로커가 더욱 급증했습니다.
시간을 더 거슬러 볼 수도 있습니다. 아직 한국에 승인되지 않은 미프진, 그러니까 미페프리스톤 외에 사이토텍이라는 제품명으로 파는 미소프로스톨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임신중지 약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원래 위장약인 이 약의 자궁수축 부작용을 발견하고 임신중지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의사가 아닌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배를 발로 차고, 산에서 구르고, 초산을 마시고, 옷걸이로 자가 낙태를 시도하다 죽지 않도록, 여성들은 서로에게 이 약을 건네고 임신중지 과정을 도왔습니다.
어떤가요. 이게 지금 우리가 101번째 유산유도제 승인 국가가 되는 걸 앞두기까지의 경과입니다. 임신중지를 아무리 처벌해도,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태어나면 키워야 할 자녀의 삶과 그에 대한 책임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은 어떻게든 서로를 살리기 위해 약을 찾았고 서로에게 전하고 서로를 살게 도왔습니다.
그 필요성을 깨달은 의료인들은 그 과정에 함께 했고, 점차 여러 국가가 약을 승인했습니다. 나아가 약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공공 보험을 통해 무상으로 이용하게 하고 의료체계를 만들고 정보 접근성을 높였습니다. 2016년 연구에 따르면 법적 허용 범위는 다르더라도 임신중지가 가능한 국가의 50% 이상이 공공보험을 통해 무상으로 임신중지 의료비 급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별도의 공적 기금을 마련해 지원하는 국가도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 일하는 곳에서 가까운 병원을 찾을 수 있게 상담과 정보 시스템도 구축되어 있습니다.
지금 복지부, 식약처나 산부인과의사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원내 처방, 원내 조제, 병원대기,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 제한, 사전 등록, 자격 인증 같은 모든 규제들이 약의 안전성이나 건강 보장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고, 오히려 접근성 제약으로 임신중지 시기 지연과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이미 먼저 약을 도입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다 확인하고 모든 규제를 없앤 현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26년입니다.
약이 도입된 100개국 중에 이 약이 위험하다고 호들갑을 떠는 국가는 일본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복지부, 식약처, 산부인과의사회는 책임을 회피하고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오직 그 일본의 선례만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미 약은 이미 전 세계 어디든 가고 있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승인을 미뤄도,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를 살리기 위해 약을 전했던 것처럼, 약은 계속해서 전달될 것입니다. 약을 전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아프지 않은 약을 만들자고 하고 있습니다. 승인을 미룰수록, 제약을 가할수록, 뒤쳐지는 것은 한국의 정부, 그리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 환경에 있어서는 이미 수십년 뒤떨어진 한국의 의료환경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청소년, 장애인, 비정규직 계약직 노동자, 이주민과 난민,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산부인과를 찾기가 너무 어려운 서울 외 지역에 모든 사람들과, 트랜스젠더/젠더퀴어/논바이너리/인터섹스/레즈비언/바이섹슈얼 임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성소수자들이 무상으로, 병원에서 처방받은 유산유도제를 자신에게 가장 안전하고 편한 시간과 공간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계속해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과 함께, 서로에게 약을 전달하며 싸울 것입니다.
이제 시작된 승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 봅시다.
그런 의미에서 같이 구호를 외쳐볼까요.
모두에게 무상으로 안전한 유산유도제 보장하라!
[발언] 수원여성회 활동가 길냥
제 큰딸은 올해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저는 11년 전, 그 아이가 제 배 속에 있을 때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낙태죄 폐지'를 위한 1인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제 배우자는 제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길 건너편에서 초조하게 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평소 사회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자였지만, 제게 "왜 하필 당신이 나가야 하느냐"고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아이를 가지기 2년 전, 임신중절을 함께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 인생의 두 번째 임신중절이었습니다. 스무 살 때 겪은 첫 번째 임신중절이 너무나 무례하고 아픈 기억이었기에, 또다시 찾아온 상황 앞에서 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금의 배우자는 그 과정에서 제가 범죄자도, 살인자도 아닌, 그저 '제 삶을 선택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제 의사를 온전히 존중하며 고통을 함께 견뎌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이 사람과 아이를 낳아도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 가족은 행복합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제가 두 번의 임신중절에서 무사히 살아남았고, 첫 상처를 극복해 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스무 살 때, 저를 금방 떠나버린 무책임한 이의 아이를 낳지 않았고, 서른 살 제 인생에서 가장 고립되고 빈곤하던 시기에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저와 배우자는 우리 아이들과 그들의 파트너가, 훗날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든 관계없이, 더 안전하게 삶의 시기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과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무거운 죄책감이나 책임을 지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첫 임신중절을 경험한 지 벌써 24년이 지났습니다. 1인시위를 뱃속에서 함께했던 아이는 곧 초경을 하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자기결정에 대한 의료 현장과 사회적 시선은 차갑기만 합니다. 여성이 온전히 안전한 세상은 이리도 더디게 오네요. 그래도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약물도입이 된다니 한걸음은 나가는것 같습니다.
함께해온 여기계신 모두의 한걸음입니다. 내 아이들이 자기 몸과 삶의 결정을 등 떠밀려 내리지 않는 세상,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두려움이 아닌 안전함과 당당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올 때까지, 지치지 않고 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발언] 산부인과 전문의
저는 매일 아침 분만실로 출근하는 산부인과 전문의입니다.
한 여성이 자신의 몸으로 생명을 품고, 긴 진통을 견디며, 마침내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을 함께합니다.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몸과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큽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안전한 임신중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모든 임신이 반드시 출산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임신을 지속하지 않기로 결정한 여성이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내리는 결정을 존중하고, 그 과정에서 여성이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안전한 의료를 제공하는 것 역시 생명을 존중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정부가 마침내 임신중지 약물 도입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오랜 시간 제도적 공백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여성 건강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약물이 허가되는 것만으로 안전한 임신중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여성이 어디에서, 어떻게, 얼마의 비용으로 이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가입니다.
정부는 초기에는 의료기관에서 의사가 직접 처방·조제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도 도입 초기 안전성을 관리하기 위한 취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전성과 접근성을 서로 반대되는 가치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병원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똑같이 의료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역에 산부인과가 부족하거나, 진료 가능한 의료기관이 없거나, 비용이나 시간, 돌봄의 부담 때문에 병원에 가기 어려운 여성도 있습니다. 의사의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결정권은 선택할 수 있다는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의료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 함께 보장될 때 비로소 현실의 권리가 됩니다.
세계보건기구는 적절한 임신주수와 의료적 조건에서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이용한 약물 임신중지를 권고하고 있으며, 임신 초기에는 환자가 약물 복용 과정의 일부 또는 전부를 스스로 관리하는 방식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을 의료체계 밖으로 내보내자는 뜻이 아닙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필요한 경우 의료진에게 접근할 수 있고, 합병증이 발생하면 적절한 의료로 연결되는 체계 안에서 여성을 자기 몸과 삶의 주체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경제적 접근성입니다.
임신중지가 비급여로만 제공된다면 경제적 여건에 따라 실제 선택의 가능성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결정권이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향후 건강보험 적용을 포함해 경제적 장벽을 낮추는 방안도 함께 논의되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의사가 임신중지를 같은 가치관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특히 분만을 경험하는 산과 의사에게있어서는 임신중지가 양심적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태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명제와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지속을 강제할 수 있다는 명제는 같지 않습니다.
의료인의 양심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양심의 결과를 임신 중지를 선택한 여성이 의료체계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대신 감당해서는 안 됩니다. 진료가 어려운 의료인에게 무조건적인 진료를 강요하기보다, 다른 의료기관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전원체계를 마련해야 합니다.
약물을 도입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접근성·경제성·안전성을 함께 갖춘 의료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임신중지를 선택하는 여성뿐 아니라, 출산을 선택하는 여성에게도 사회적 안전망이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여성이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출산을 선택한 여성에게 주거와 의료, 돌봄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더욱 보장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에, 저는 안전한 임신중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여성의 몸과 삶까지 함께 존중하는 의료 환경을 만들어가도록 같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