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 격월간 북클럽 다불다불 11월의 책은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
계속되는 ‘역차별’ 담론, 어떻게 봐야 할까? ‘피해자 말만 듣는’ 법 때문에 '무고한' 피해자가 될까 봐 '억울한' 그들, 왜 그럴까? 존재하는 차별을 무시하는 전략적 피해자성은 어떻게 특권이자 무기로 남용될까? 이런 질문들을 안고, 페미니스트들과 '다정하고 불온하게'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금요일 저녁 열린 뜨거운 대화에 함께한 후원회원 지영님의 후기를 공유합니다.

다정하고 불온한 분들과 대화를 하면
지난 9월 22일.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문자가 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죄송스럽지만, 평소엔 그냥 응 그래 그래 열심히들 하시는구나 이러면서 살짝 건성으로 보고 넘겼다. 그런데 이번 문자에는 눈은 확 끄는 제목이 있었다.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 이런 책이 있다고? 이걸 읽고 독서 모임을 한다고? 어머, 이건 가야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참가 신청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임에는 다음 날 아침 대장내시경 이슈로 30분밖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후 어떤 대화가 이어졌을지 너무 궁금해서 메일을 보내 양해를 구하고 대화록을 받아볼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두 달 만에 다시 문자가 왔다. 이번 책 제목은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 세상에. 이렇게 귀신같이 매력적인 제목으로 책을 쓰는 작가분이 있고, 이런 책 출간을 또 귀신같이 알고 모임 도서로 선정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니! 이번에도 바로 참가 신청을 하고, 책을 빌려다 진짜 <열><심><히> 읽은 후, 함께 즐길 따끈한 호두과자를 안고, 합정역으로 갔다. 지난 모임에서 뵀던 활동가님들도 계셨고, 나처럼 모임 참가를 위해 오신 회원(?) 분들도 계셨다. 총 8명이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우선 각 장별 발제를 맡아주신 분들께서 꼼꼼하게 내용을 짚어주셨다. 이후 자유롭게 감상을 나눴다.
독서 모임에는 항상 배움이 있다. 책이 좀 이상해도, 함께 대화하는 사람들이 약간 별로여도, 그래도 뭔가를 배우게 된다. 혼자 읽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소중한 무언가를 알게 된다. 이번 모임의 경우 책은 나쁘지 않았고, 함께한 분들은 더 바랄 나위 없이 훌륭한 분들이었다. 당연히 뭔가를 왕창 배웠다.
가장 중요한 배움은 이 빡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화 내내 암울한 현실에 대한 참여자들의 성토가 이어졌고, 그래서 여기저기서 한숨이 계속 나왔고, 그래서 점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그게 힘이 됐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 이렇게 멀쩡하게 훌륭한 분들이 함께 분노하고 있다는 연대 의식이 마음을 채웠다. 대부분의 독서 모임에서는 ‘같은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각자가 다른 부분에서 감동을 받고 다른 것을 읽어내는구나’가 깨달음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번 모임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그날 거기는 ‘피해자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니.
책이 잘 읽히지는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문장이 명료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고, 결론이 엥? 하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강자인 가해자들이 약자의 피해자성을 어떻게 도둑질하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과 문제 제기만으로 이미 충분히 훌륭한 책이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시끄럽게 들려오는 강자의 목소리에 이끌려 엉뚱한 사람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그에게 감정이입하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약자에겐 목소리가 없다. 약자의 목소리를 빼앗는 것이 ‘피해자성’ 운운하는 상식과 법률의 잣대다.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가해자의 논리가 어디까지 뻔뻔스러울 수 있는지, 나를 포함한 대중은 어디까지 무개념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 것이 이번 독서 대화의 두 번째 배움이다.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다’. 이것이 ‘불온하다’의 사전적 정의다. 그렇다. 무척 피곤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정해야 한다. 우리끼리는 서로 다정하게. 권력에 맞서려면 힘들고피곤하니까. 다정하고 불온한 분들과 대화를 하면 그래서 더 제대로 불온할 수 있게 된다. 다정함을 연료로 불온함을 활활 불태울 수 있었던 이번 독서 모임의 시간들이 새록새록 소중하다.
이 후기는 후원회원이자 북클럽 참여자 지영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