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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수다모임 <페미니스트 아무말대잔치> 2025년 8~10월 후기
  • 2025-10-23
  • 192

회원 소모임이자 여성주의 수다모임인 <페미니스트 아무말대잔치>는 매월 세 번째 금요일마다 열리고 있습니다.


8월 모임은 세 번째 금요일이 광복절이어서 일정을 한 주 미뤘어요.

그 대신 8월 23일 토요일에 함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기로 하였는데,

저마다 예매한 영화가 다 달라서 시작하고 끝나는 시간대가 서로 어긋나고 말았어요.

결국 아쉽지만 다 함께 모이지는 못하고 단톡방에서 서로 영화 잘 보라는 인사만 나누었습니다.


영화 <파기상접> GV


9월 19일 모임은 오프라인과 온라인(ZOOM)을 병행하여 앎, 나타샤, 이음, 햇님, 리나 총 5명이 참여하였습니다. 

햇님의 후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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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유리창이 숨을 쉬듯 흔들렸다.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페미말대잔치’라는 이름의 방으로 들어갔다. 화면이 밝아지며, 나타샤님, 앎님의 얼굴이 떴고 이음님의 이름이 떴다. 익숙한 분들이 드디어 내게 말을 걸어주셨다. 그제야 내 안의 긴장이 천천히 풀렸다.


저번 달 영화 모임을 놓친 탓에, 오늘은 이 시간이 더 간절했다. 우리 대화에는 언제나 영화가 빠지지 않는다. 한 분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본 영화를 여럿 소개해주셨다. 〈펑크처럼 퀴어하게〉라는 말레이시아 퀴어 펑크 밴드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 나라에서는 언론이 성소수자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조차 불법이라고 하셨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너무 익숙한 통제의 감각 때문이었다. 몸을 죄는 법.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 그 다음엔 개막작이었던 <선샤인>. 필리핀의 이야기. 낙태가 어떤 상황에도 예외 없이 금지된 나라. 인간의 몸이 법의 족쇄로 고정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아프게 그려졌다.


앎님은 중국 여행에 다녀오면서 겪었던 일을 말씀해 주셨다. 그곳에서 만난 한 한국인의 질문.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한다고요? 요즘은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해놓고 성폭력이라 무고하는 일 많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웃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웃음 속에는 분노가 있었다. 이 분노는 깊고 오래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일상에 스며든 목소리였다.


어느 한 프로그램의 이야기도 나왔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방송. 그러나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한다. 공감보다 흥미로, 상처보다 시청률로. “현실의 눈높이가 아니라,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이 말은 천천히 내 안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미국의 사건. 18살 가수, 14살 여성, 실종, 트렁크. 숫자 대신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이 있었을 사람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이상하게도, 성폭력 사건 하나보다 ‘무고’라는 단어 하나가 세상을 더 크게 흔든다. 나는 묻고 싶었다. 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피해자’만 상상하고, ‘진실을 말하는 피해자’는 믿지 않을까.


이음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아동 성착취 범죄 추적을 위한 인공지능 사이트. 이 단체의 이름은 ‘Thorn’, 가시. 아이들을 지키는 기술이 또 다른 감시의 이름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누군가의 안전이, 누군가의 자유를 대신해야만 지켜지는 세계.


대화는 자연스럽게 성교육으로 흘렀다. “아이들이 성교육을 받으면 문란해진다.” 이 말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비웃었다. 성교육은 문란함의 교과가 아니라 존중의 문법이다. 금지의 말이 아니라 경계의 언어다. 그러나 어른들은 언제나 책임을 피하기 위해 금기를 만든다. 


빗소리가 조금 더 세졌다. 창밖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인간은 도덕적 판단을 할 때 이미 결론을 내린 뒤, 그 이유를 꾸며내는 거 아닐까요?” 나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감정이 먼저 길을 내고 이성은 그 길 위에 표지판을 붙인다.


연극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지람 배우가 출연한 〈프리마파시 – 겉으로 보이는 진실〉. 가해자 변호사로 일하던 여자가 피해자가 되는 이야기. “돈 받은 만큼 일했을 뿐이야.” 그의 말은 법정에서 통했지만,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법은 언제나 피해자의 말을 번역하지 못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몸을 증거로 내놓아야만 존재를 인정받는다. 누군가 말씀하셨다. “이 연극은 피해자들이 보기엔 너무 아플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이 고통은 현실의 모양을 그대로 비춘다. 진실이란, 늘 피를 흘리며 나타난다.


시간은 어느새 밤 10시 반을 넘어 있었다. 항상 그렇듯, 끝날 때 쯤이면 우리는 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간다. AI 상담의 문제. 인지 왜곡, 허구, 감정의 손상, 허상의 강화. 공감을 흉내 내는 기계의 말. 그건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척하지만, 결국 닿지 않는다. 진짜 위로는 데이터로는 번역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결혼식과 장례식 이야기. 누군가는 말했다. “식장 말고, 식당을 빌려 홈파티처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누군가는 말했다. “그게 진짜 예식이 아닐까요?” 우리는 웃었다. 허울 대신 사람, 의식 대신 대화. 비는 여전히 내렸다. 창문 위로 흰 빗줄기가 흘러내렸다. 법과 현실 사이의 간극. 피해자의 언어와 사회의 언어 사이의 간극. 진실과 겉으로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 이 사이에서 우리는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말하고 기록하고 저항한다. 비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빗속에서 나는 우리가 남긴 목소리를 오래도록 붙잡고 싶었다. 이 목소리는 살아 있다. 사람의 온도다. 그리고 이 온도가 또 나를 살린다.


연극 <프리마 파시>에서 이자람의 공연 사진 ⓒ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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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모임은 원래 온/오프라인을 병행할 예정이었으나, 당일 불참자가 많아 앎, 나타샤 총 2명이 오프라인으로 오붓하게 진행하게 되었어요.

친밀한 관계에 관한 고민이나 노동 중에 겪은 부당한 일, 경제 범죄 피해 등 평소보다 깊은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곧 개봉하는 여성 영화 <양양>과 <세계의 주인> 등에 관한 정보와 기대감을 이야기 나누기도 했습니다.


(왼쪽) <양양> 포스터 ⓒ영화사 진진, (오른쪽) <세계의 주인> 포스터 ⓒ바른손이앤에


다음 모임은 11월 21일(금) 오후 7시에 온/오프라인을 병행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함께 수다 떨고 싶은 페미니스트 회원 및 비회원 지지자/연대자 누구나 환영합니다!

참여하고 싶은 분은 주저 말고 편하게 신청해 주세요! ☞ https://bit.ly/2025상담소소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