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 후기
밀양 탈핵 탈송전탑 운동과 함께 하다
5월 말,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 공동주최 참여 요청을 받았고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상담소의 올해 활동방향 중 하나가 ‘연대로 일상을 바꾸는 여성주의 운동’이었고, 또 우리에게는 ‘밀양 할매’와의 연대 필요성, 탈핵 의제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얼마 전 22대 총선을 맞아 진행했던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활동가와 회원들이 생태와 기후위기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도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10여년 전, 한국전력은 핵발전소에서 서울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밀양 곳곳에 초고압 송전탑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사업 계획은 송전탑이 세워질 마을 주민들에게는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 초고압 송전탑의 소음 문제나 전자파가 인체, 소와 벌에게, 작물에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한전은 오로지 ‘합의금’만 이야기했다. 뭘 얘기해도 ‘합의금’으로만 귀결되는 논리는 주민들에게 제대로 가닿지 못했을뿐더러, 주민들의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밀양 할매’로 대표되는 밀양의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격렬히 싸웠다. 결국 한전은 국가의 힘을 빌린 행정대집행을 통해 지금의 송전탑을 지었다. 이 모든 투쟁 과정에서 주민 두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300여 명의 사람들이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입건되기도 했다(참고: “우리가 쓰는 전기, 할매들 눈물…밀양행정대집행 10년”).
하지만 밀양의 투쟁이 실패했다거나 진 것은 아니었다. 밀양 탈핵탈송전탑 운동은 한국사회에 탈핵의 필요성을 알려냈다. 또한 서울이 ‘지방’을 착취하여 움직이는 현실, 경제 논리만을 가지고 생태를 파괴하고 개발을 이상화하는 현실 등이 밀양 투쟁으로 드러났다.
밀양 행정대집행 10년이 지난 지금. 윤석열 정부가 원전 개발에 힘쓰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밀양 탈송전탑 탈핵운동이 남긴 화두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렇기에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의 부제는 ‘전기는 아직도 눈물을 타고 흐른다’ 였을 것이다. 그 당시 세워졌던 송전탑에서 서울로 오는 전기는, 밀양 주민들의 눈물을 타고 흐르고 있고,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희망버스에 탑승하는 사람들이 많길 바라면서, 상담소 홈페이지와 SNS에도 희망버스 같이 타자는 권유의 글을 올렸다. 다행히 알음알음 함께 버스를 타는 친구들도 생겼고, 밀양 인근에 거주하는 상담소 회원 한 분은 직접 결의대회 현장으로 오시겠다는 반가운 말씀을 전해주시기도 했다.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
다시 타는 희망버스 당일, 아침 7시20분에 시청역 2번 출구 앞에서 모였다. 이 날은 비가 예정되어 있어서, 우비와 우산을 잘 준비했다. 서울에서 밀양으로 가는 버스는 총 7개가 있었고, 나는 1호차에 탑승했다. 자기소개를 하고 ‘나, _____ 에게 밀양은 _____입니다’ , ‘탈핵탈송전탑운동에 ______ (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엽서 쓰기를 하였다. 1호차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과 밀양의 탈핵탈송전탑 운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많이 얘기했다.
밀양에 도착한 후 밀양/청도의 765kV 송전탑 현장을 방문했다. 버스마다 각각 다른 마을의, 각각 다른 송전탑에 들렀다. 밀양 할매들은 송전탑 건설 이후 마을과 환경과 신체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얘기해주었다. 비가 엄청나게 오는 날이었는데, 그런 날에는 유독 송전탑이 ‘웅웅웅’ 소리를 낸다고도. 우리는 잠시 숨을 죽이고 ‘웅웅웅’ 송전탑의 소리를 들어보기도 했다. 또 연대자들을 보고 힘이 난다는 얘기를 울고 웃으며 전했다. 과거에 버스를 탔던 사람들도 눈물로, 웃음으로 함께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과, 새롭게 현장을 방문하며 나와 밀양을 연결짓는 연결감이 가득한 자리였다. 그 와중에도 송전탑은 ‘웅웅웅’ 하며 전기를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송전탑을 뽑아내자’ 라고 외쳤다.
밀양에서 일어난 국가폭력과 마을 공동체의 관계 훼손, 그에 맞선 탈핵탈송전탑 운동을 구술로 담아낸 책인 <전기, 밀양-서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송전탑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남은 것은 온통 폐허다. 그 폐허에서도 언젠가 송전탑이 뿌리 뽑혀 새와 나무와 꽃들에게 산천을 돌려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삶이 온통 꽃밭이어서가 아니라 삶이 엉망진창이더라도 그것을 살아 내는 것이 인생이라고 믿기 때문에 오늘도 폐허에서 삶을 가꾼다. 내 살아생전은 아니더라도, 설사 내 다음 세대의 살아생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송전탑은 뿌리째 뽑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폐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송전탑과 원전이 아니라 탈송전탑과 탈핵이 미래라는 것을 확고히 믿기 때문에 오늘의 폐허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171쪽, 부서진 마을 중)
이미 세워진 송전탑을 뽑아내자는 것은 단순히 구호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곧 미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외치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모든 참여자들이 뒤이어 밀양행정대집행 10년, 윤석열 핵폭주 원천봉쇄 결의대회 집회로 이동했다. 광장에서는 ‘밀양 할매’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싸움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울려퍼졌다. ‘우리 모두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밀양에서 벌어지는 탈핵탈송전탑 운동이 사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내 위치에서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밀양’과 ‘저 밀양’
이 운동과 저 운동이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것을 어떻게 더 잘 설명할지 활동가들은 늘 고민한다. 그런데 이번 ‘밀양 희망버스’ 에 함께 할 때는 이 고민이 좀 더 깊었다. 상담소가 다시타는 밀양희망버스가 함께 하기로 한 다음 주인 6월, 한 유튜버가 갑자기 2004년 밀양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신상공개는 피해자와 상의하지 않고. 피해자의 동의에 반해서 진행되었다. 상담소는 피해자를 우선으로 고려하지 않고 조회수만을 위해 사건을 소비하는 유튜버를 막기 위해 성명을 냈다. 그리고 갑자기, 유튜버의 신상공개에 환호하던 시민들이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움은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아직 피해자를 중심에 두고 성폭력 사안을 사고하는데 익숙하지 않으니까. 자신이 원치 않을 때, 원치 않는 방식의 나의 피해가 호출되는 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의미일지.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것에는 분노하지만, 그렇다고 가해자들의 신상이 온라인 공간에서 마구 퍼져나갔을 때 나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지 걱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마치 경주라도 관람하듯 신나게 유튜브를 바라보던 일군의 사람들이 갑자기 상담소의 밀양희망버스 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가 혼란스러웠다. 밀양희망버스에 연대하는 것을 보니, 상담소가 정치적인 곳인 게 틀림없다는 비판이었다면 오히려 이해했을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곧 정치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종종 ‘너 정치적이다’는 말로 약자들의 연대를 가로막으니까. 그런데 ‘밀양희망버스로 ‘밀양을 홍보한다’거나, ‘직원 중에 밀양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이 시국에 갑자기 밀양 얘기를 하냐’는 댓글과 항의전화에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게시글을 이렇게 안 읽어보나?’ 는 생각과 더불어… 근본적인 고민이 들었다. ‘그 밀양’과 ‘저 밀양’을 같게 생각한다구?
악플러들의 여론몰이는 어쩌면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지하게 ‘밀양희망버스가 뭐예요?’ 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밀양희망버스에서 ‘나에게 밀양은 _____입니다’ 라는 엽서를 쓸 때, 나는 밀양의 탈핵탈송전탑 운동과 2004년에 일어났던 밀양 성폭력사건을 어떻게 함께 얘기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연대’라는 것
연대란 무엇일까? 사전은 연대를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그리고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라고 정의한다. 나도, 연대라는 것은 나와 당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배웠다.
밀양의 탈핵탈송전탑 운동은 서울에서 반성폭력운동을 하는 단체의 운동이기도 하다. 전기가 밀양 주민들의 눈물을 타고 흘러와 서울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밀양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는 경제와 개발을 논리로 가장 소외된 고리를 착취하길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다시 <전기, 밀양-서울>을 인용해본다.
“(...) 타인의 위험과 희생을 대가 삼아 거리낌 없이 전기를 사용하며 안락한 삶을 살아왔다는 죄책감이 아니라 원자력발전소 인근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이 사회적 이웃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감이다.
죄책감은 우리를 움츠리게 만들고 때론 나의 죄와 연결된 참혹하고 남루한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빚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죄책감이 만들어 내는 마음의 고단함을 벗어던지고자 우리는 그 빚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친다. (...)
하지만 내가 쓰는 전기를 실어 나르는 송전선로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매일같이 송전탑 아래에서 웅웅거리는 소음과 번쩍거리는 거대한 불빛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나면 (...) ‘거기’서 살고 있는 ‘누군가’가 이름을 가진 존재가 되고 ‘여기’서 살고 있는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순간 ‘그’와 ‘나’ 사이에 연결된 끈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나’는 더 이상 이 끈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그’가 경험하는 고통과 위험이 ‘나’의 문제가 되는 순간 비로소 ‘연대’가 시작된다.” (17-18쪽, "도시로 가는 전기" 중)
사람들은 반성폭력 운동에도,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연대한다. 2004년 밀양의 성폭력 사건이 다시 사회적 논란이 된 이후, 상담소에는 정말 많은 댓글, 메일, 전화가 왔다. 고심 끝에 피해생존자와 그 가족의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한 모금함을 오픈한 후에도 전화는 이어졌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전화가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기부를 해본 적 없고, 기부가 실제로 도움이 될거라고 믿은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 사건에는 후원을 했고, 자신도 왜 후원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그래서 혼란스러운 마음에 연락한다는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의 혼란스러운 후원자와 함께 나도 혼란스러웠지만(목소리로 추정컨데 그는 아마 남성이었는데, 당시 질문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무조건 트집을 잡고 욕을 하는 남성 항의자들의 전화가 워낙 많아서 처음에 내가 방어적이기도 했었다), 돌이켜보면 그 후원자도 ‘연대’를 행했던 거 아닐까? 성폭력 피해생존자가 경험하는 고통과 위험이 나의 문제가 된 것 아닐까?
서울에 살며 전기를 쓰고, 밤거리를 다니고, 에어컨을 켤 때 느끼는 어떤 죄책감. 그럼에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나의 문제로 소화시켜 어떻게 책임을 다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사회가 여성을 착취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폭력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느끼는 죄책감도 이와 비슷할까?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남성문화가 문제라니, 나더러 가해자라는 것이냐’고 화내지 않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택하는 것이 바로 연대이다.
사회운동에 한 번도 후원한 적이 없지만 처음 후원을 시작하는 사람들. 밀양의 희망버스를 ‘다시 함께’ 타며 자원과 에너지를 최대한 정의롭게 사용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왜 밀양송전탑이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폭력 운동도 탈핵탈송전탑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연결의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보는 것. 밀양 성폭력 사건이 지난 후 20년이자,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10주년이 된 올해, 나에게 ‘밀양’은 그런 의미가 된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모든 회원들도 나름의 ‘연대’의 의미를 찾으며 사회에서 함께 책임을 져 나가는 법을 모색할 수 있길 바란다.
이 글은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수수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