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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EBS 다큐 프라임 여성백년사> 1부 신여성 내음새 글로 읽기
  • 2022-11-30
  • 1058

“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다.” – R. G. 콜링우드


지난 11월 7일, EBS는 ‘여성백년사’ 3부작을 순차적으로 공개했습니다. EBS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 –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는 발전된 현대이지만 여전히 한 치 앞으로 내다볼 수 없는 삶에서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답을 찾으려는 역사 다큐멘터리입니다. 100년 전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재정의함으로써 현재 동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공감과 위로, 또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과거 여성차별과 그를 정당화했던 수많은 이유들은 현대 여성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1부 <신여성 내음새>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회자되는 ‘최초’의 여성인물들을 다룹니다.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계에 등단한 작가 김명순, 여성 최초로 단발머리를 한 강향란. 그들은 그 때의 여성들과 다른 시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배척되어야 했습니다. 당시 ‘여성답지 않은 것’, ‘남성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계집’ 등의 멸시와 조롱들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의지는 우리에게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위로와 응원을 전하는 느낌입니다. 2부 <직업 부인 순례>는 100년 전 여성들은 다양한 직업군에서 포기하지 않고 활약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3부 <N번의 잘못> 한국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일깨운 N번방 사건 이후 100년 뒤 사람들에게 전하는 연대의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이번 나눔은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현대의 시선이 100년 전과 다름이 없음을 보여주는 1부의 에피소드를 전하고자 합니다.

* 1부는 유튜브에서 2,3 부는 EBS, 티빙 등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부 신여성 내음새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진실은 결국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당신을 분노하게 만들 것이다.
- 글로리아 스타이넘


Episode1. 생명의 과실


김명순은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이자 시인입니다. 그는 1915년 동경에서 유학 중에 실종되었는데, 이를 다룬 ‘동경에 유학하는 여학생의 은적’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됩니다. 실종과 연관된 성폭력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김명순은 남성을 유혹한 헤픈 여성, 몸이 더럽혀진 계집 등의 2차 가해로 괴롭혔습니다. 조선인 “여성” 유학생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사건으로 조사되기 이전에 김명순에게 ‘성폭력을 당한 더러운 여자’라는 꼬리표로 남게 된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순결하지 못한 처녀가 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그를 퇴학처리 했습니다. 이후 1917년, 문예지 <청춘>의 특별 대현상 모집에서 김명순의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3등으로 입상하며, 21세의 나이에 최초로 문단에 등단한 여성 작가가 됩니다. 김명순 작가의 실력은 이광수는 “조선 문단에서 낡은 양식을 완전히 벗어난 소설로서는 <의심의 소녀> 뿐인가 싶다”라며 극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남성 문인들은 그의 뛰어난 문학성을 질투하고 시기하며 ‘김명순 죽이기’ 로 그를 공격했습니다. 김기진 평론가는 잡지 <신여성>에서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에서 육욕에 거친 윤택하지 못한 지방질은 거의 다 말라 없어진 퇴폐하고 황량한 피부”에 그의 글을 비유하며 비난했습니다. 김명순은 당대의 조롱과 차별에 글쓰기로 맞서며 <김기진의 공개장을 무시함>등의 글로 비난과 조롱에 대응했으나 잡지사는 그의 글을 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김명순은 자전적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 여성 문인 최초의 창작집 『생명의 과실』(1925)을 당당히 발간하고, 1세대 여성 기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동인과 김기진 등 남성 작가들의 인신공격적 비난과 문단의 지속된 따돌림으로 김명순을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납니다. 김명순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며 한국 문학사에서 잊혀졌고, 그의 문학전집은 2009이 되어서야 처음 나오게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은 ‘몹쓸 짓’, ‘일탈’ 등으로 불리며 범죄의 심각성을 약화시키고, 피해자를 성적으로 묘사하는 등 가해자의 시각에서 사고해왔습니다. 미투운동은 성폭력은 개인의 성욕 때문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고발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을 가능케 했던 문화가 구조적으로 존재함을 깨달았습니다. 사회는 바뀌고 있고, 앞으로도 바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될 피해자들을 줄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면밀히 살펴 뿌리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일 것입니다. EBS 다큐 프라임 <여성백년사>는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며 무력감과 분노를 느껴왔던 모두에게 “강간문화는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틀린 것이다”는 확신과 동력을 줄 것입니다.


<이 글은 자원활동가 기자단 '틈'의 노을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