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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6월의 특집기획 : 성폭력추방운동사 10대
  • 2005-09-16
  • 16640

6월의 특집기획 : 성폭력추방운동사 10대 사건
 




성폭력, 성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결성된 한국성폭력 상담소가 2001년 4월로 개소 1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에 상담소에서는 성폭력 추방에 영향을 미친 10대 사건을 꼽아보았습니다. 아래의 '성폭력 추방 운동사 10대 사건'의 순서는 중요도와 관계없이 연대기별 서술입니다.

변월수 사건
강정순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김부남 사건
김보은 김진관 사건
성폭력특별법 제정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롯데호텔 성희롱 사건
강릉 K양 사건
사단장 성추행 사건




 

변월수 사건



1988년 9월 10일 주부 변월수씨가 한밤의 귀가길에 강간범의 혀를 잘라 자신을 방어한 사건이 일어났다. 변월수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 남성의 혀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되었고 과잉방어라는 이유로 징역1년을 구형받았다. 여성운동단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정당방위로서 인정될 수 없는 지나친 행위'라며 변월수에게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성폭력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나타나는 성차별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가해자측의 변호사는 변월수가 사건 당일 먹은 술의 양, 동서와의 불화 등을 계속 거론하면서 그를 부도덕한 여자로 몰아세웠고, 폭행 당시 행위의 순서가 진술 때마다 바뀐다며 검사가 호통을 치는 등 오히려 '피해자가 죄인으로 취급되는' 성폭력 재판과정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1심판결에서 여성에 대한 사법부의 편견과 여성의 인권보다 남성의 혀를 더 중시하는 사법부의 태도를 여실히 드러냈다. 2심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아 여성의 자위권을 법적으로 인정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은 성폭력의 위기에 처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정당'한 자기 방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유진 감독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중에서







강정순 사건



대구 대현동 강정순씨 사건

1988년 12월 5일 대구시 대현동 파출소내에서 경찰관 2명이 한 여인을 윤간하였다. 가해자인 박승근 순경과 김정부 경장은 이 여인을 모욕, 협박하고 윤간하여 성병까지 옮겼다. 경찰에서는 피해자인 강정순씨가 다방 여종업원이었다는 점을 이용하였다. 경찰은 피해자인 강정순 씨를 무고죄로 맞고소를 하였다.

공정한 수사를 하여야 할 검찰은 가해자인 경찰을 도와 증거은폐, 조작까지 하였으며 피해자인 강정순씨를 간통죄와 무고죄로 구속하였다. 여성단체들은 이 사건에 대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성명서와 경찰, 검찰에 대한 규탄대회, 치안본부 항의방문, 가두홍보 등 열심히 활동하였다.


결국 강정순씨는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가해자인 두 경찰은 끝내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1992년 2월 19일 여연은 "대구 강정순씨 윤간사건" 무혐의 처리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통해 사법부의 인식의 한계와 공권력의 횡포를 규탄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사건개요

* 1986년 6월 : 5. 3 인천사태 진술을 받기 위해 성고문
: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원회 발족
* 1986년 7월 : 권인숙 문귀동 경장 강제추행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
: 변호인단이 문귀동·부천경찰서장 등 경찰 6명 고발
: 문귀동이 권인숙 명예훼손 및 무고혐의로 맞고소
* 1987년 : 한국여성연합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로 권인숙 선정
* 1989년 : 대법원에서 문귀동 징역 5년, 위자료 지불 판결
* 1993년 : 가해자 문귀동 5년 만기 출소



1986년 6월 권인숙은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하던 중 부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담당 형사 문귀동은 '5. 3 인천사태' 관련 수배자 소재지를 파악하기 위해 권인숙에게 성고문을 가하였다. 이에 감옥에 있던 권인숙은 변호사를 통해서 자신이 당한 성고문 사건을 언론과 여성단체에 알렸으며 문귀동을 강제추행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고, 권인숙의 변호인단은 사건 관련 경찰 6명을 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로 고발했다.


이 사건의 지원을 위해 여성단체들은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를 구성했으며, 여성단체·시민단체· 종교단체 등이 연합한 '부천서성고문사건공동대책위'를 꾸려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난 뒤에도 문귀동에 대한 처벌은 커녕 피해자인 권인숙을 공문서 위조죄로 체포하였으며, 문귀동 역시 가해 사실을 은폐한 채 권인숙을 명예훼손 및 무고혐의로 맞고소했다. 이러한 정부와 문귀동의 처사에 더욱 분노한 여성단체들의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성고문 사건에 대한 분노는 전 국민들에게 퍼져나갔고, 거의 매일 성고문·용공조작·폭력정권 규탄대회가 열렸다. 변호사 166명이 변호인단으로 참석하여 공개재판을 요구하였고, 많은 여성들이 재판정으로 몰려드는 등 독재정권 하에서 보기 드문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피해자인 권인숙씨는 풀려나고, 사건발생 3년만인 1989년 대법원은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하였으며 권인숙씨에게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사건의 의의

이 사건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기 꺼려하던 사회 분위기에서 피해 여성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성폭력의 실상이 폭로되고, 공론화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또한 이 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여성 인권 유린을 처음으로 폭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군사독재정권의 반인륜성과 야만성을 전국민에게 폭로되었으며 '87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여성운동사적인 측면에서도 이 사건은 여성문제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일반 대중 여성들의 폭넓은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는 것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김부남 사건


사건개요

* 1991년 1월 30일 : 사건발생 / 사건현장에서 구속
8월 26일 : 1심 선고 - 징역2년 6월 집행유예3년, 치료감호
12월 20일 : 2심 선고 - 항소기각
* 1992년 4월 20일 : 3심 선고 - 상고기각
* 1993년 5월 1일 : 김부남 출소



1991년 1월, 어린이성폭력피해자 김부남씨가 21년전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를 찾아가 살해한 사건이 전라북도 남원에서 일어났다.
김부남씨는 (사건당시 30세) 9살 때 이웃집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였지만 어릴적 강간당한 후유증으로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등의 행동을 하게 되었다.
김부남씨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의 근원이 어릴적의 성폭행사건임을 알게되었고, 그때야 고소를 하려 했지만 당시 성폭력범죄는 친고죄로 고소기간은 6개월이었으므로
이미 공소시효도 훨씬 넘긴 이후였다.
김부남씨는 법적으로는 이미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되자, 스스로 가해자를 벌하기로 마음먹고 식칼을 들고가서 가해자를 살해한 후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공대위 활동

이 사건이 지방지에 보도된 후, 이해 4월 10일, 전북지역의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김부남씨의 무죄석방을 위한 활동의 필요성이 논의되면서 <김부남 사건 대책위원회 (이하 대책 위)>를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책위는 김부남씨 면회와 가족면담, 공동변호사 구성, 공판 참관, 판사 면담, 기자회견 등을 통한 각 언론사 홍보, 서명작업, 후원회구성과 기금마련 활동(양말판매)등을 하였다.
이와함께 성폭력 피해에 관한 사회적 인식전환의 필요성과 성폭력관련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활동도 함께 하였다.



이 사건의 의의

이 사건은 어린이성폭력의 후유증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라는 김부남씨의 절규는 당시 성폭력의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고,
성폭력은 몇몇 운나쁜 여성의 문제라는 일반인들의 척박한 인식전환에 크게 기여를 했다.
전주지역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김부남 사건 대책위원회>의 활동은 우리나라 성폭력 추방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한 중요한 사건이다.
특히 김부남후원회는 이후 성폭력예방치료센터(1994년 개소)의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어린이 성폭력피해자 김부남씨 사건은 다음해에 일어난 김보은, 김진관사건과 함께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보은, 김진관 사건



사건 개요

1992년 1월 17일 : 사건발생
1월 19일 : 구속
4월 4일 : 1심 선고 - 김진관 징역7년, 김보은 징역4년
9월 14일 : 항소심 선고 - 김진관 징역5년, 김보은 징역3년
집행유예5년
10월 2일 : 김보은 석방(판사직권 석방)
12월22일 : 상고심 선고 - 상고기각
1993년 2월 : (김영삼 대통령취임시) 김보은 사면복권, 김진관
잔여형의 1/2감형
1995년 2월 17일 : 김진관 출소
1998년 2월 3일 : 김진관 복권신청(김대중대통령취임기념
대사면복권시), 기각
7월 16일 : 김진관 복권신청(건국50주년기념 8.15대사면
복권시), 기각


1992년 1월 7일, 13년동안 의붓딸을 성폭행해온 가해자 김영오를 피해자 김보은의 남자친구인 김진관이 살해한 사건이 충북 충주에서 일어났다. 김보은의 어머니는 보은이가 7살 때 김영오와 재혼을 했고 김영오는 의붓딸인 보은이가 9살 때부터 상습적인 성폭행을 시작했다. 김보은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주중에나마 아버지와 떨어져 기숙사에 머물게 되었고, 학교 친구인 김진관에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진관은 고통스러워하는 보은이를 도우려는 마음에 그날 밤 김영오를 찾아가 "이제 보은이를 놓아주라" 고 간청했지만 당시 충주검찰청에 총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영오가 오히려 "다 잡아넣겠다. 죽여버리겠다"고 당당하게 나오는 데에 격분하여 가해자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공대위 활동내용

이 사건은 김진관의 아버지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상담을 의뢰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곧이어 전국에서 <김보은, 김진관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구명활동을 시작했다. 공대위는 이 사건이 우리 사회의 부재, 법적 제도적 장치의 미비함 등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그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을 갖고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항소심을 준비하면서 공대위는 전국 56개로 확대되었고, 22명의 의료공동변호인단도 구성하였다. 공대위는 공판참관과 함께, 성폭력 피해에 관한 사회적 인식전환의 필요성과 성폭력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 사건의 의의

김보은,김진관 사건은 그동안 금기시되어왔던 근친성폭력의 엄청난 실상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고, 안식처로 여겨지던 가정내에서 일어난 성폭행, 그래서 방치될 수밖에 없었고 또 지속될 수 밖에 없는 근친성폭력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전 년도에 일어난 김부남사건과 함께 우리나라 성폭력에 대한 인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전국규모의 <김보은.김진관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세심하고 조직적인 활동은 성폭력피해자 보호와 성폭력추방운동의 장을 새롭게 마련한 점이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1993년에 제정된 폭력특별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성폭력특별법 제정



성폭력특별법제정추진특별위원회 활동 개요

1991. 8. [성폭력특별법 제정 추진 특별위원회] 결성
1992. 7. 성폭력 특별법 시안 완성
1992. 8. 이우정 국회의원 여성계안 국회에 상정
1993. 12.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령] 통과
1994. 4. 성폭력특별법 시행
1997. 7. 성폭력특별법 개정안 통과
1998. 1. 성폭력특별법(개정안) 시행



대책위 활동내용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하여 성폭력 관련 상담을 하는 여성단체와 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여성,사회단체 등 12단체가 1991년 8월에 <성폭력특별법제정추진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폭력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성계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수차례의 논의를 거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1992년 7월에 성폭력특별법 시안을 완성하여 발표했다.


이를 이어 1991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시 성폭력문제해결을 선거공약으로 내놓았던 민자당과 민주당, 국민당에서도 각기 준비한 성폭력특별법 시안을 발표했다. 여성계의 시안은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이우정 국회의원이 국회에 상정하였다.
여성계의 시안과 각당의 시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여성계의 시안과 각당의 시안이 국회에 상정된 후 여성계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권이 최대한 보호되고 성폭력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한 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활동을 하였다.
또한 형식적이 아니라 내용을 갖춘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성폭력추방과 올바른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동결의대회>,<올바른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성폭력추방을 위한 문화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법제사법위원회 위원들과의 면담, 올바른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앞 시위를 수차례 하였다.



결과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93년 12월에 성폭력 특별법이 통과되어 1994년 4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 통과된 특별법은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만들어진 여성계의 주요안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제정된지 3년만인 1997년 7월 30일에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1998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개정 과정에서도 역시 여성계에서는 개정 방안에 대한 의견을 끊임없이 제시하였고 공청회에 참가하여 여성계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성폭력특별법은 아직까지도 성폭력피해자의 권리보호에 미흡한 부분이 많으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개정작업을 펼쳐가야할 것이다.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사건 개요

1992. 5. 29 우조교가 화학과 기기담당 조교로 임용-성희롱 시작
1993. 6. 재임용 탈락
1993. 8. 교내 대자보로 호소
1993. 9. 신교수가 우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
1993. 10. 19.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 결성
1993. 10. 우조교가 신교수, 서울대, 대한민국 정부를 고소
1994. 4. 18. 1심 선고 : 신교수에게 우조교에게 3천만원 배상토록, 신교수가 항소
1995. 7. 25. 2심 선고 : 신교수, 서울대, 대한민국 정부에게 무죄판결
1995. 8. 17. 우조교 상고
1998. 2. 10. 상고심 선고 : 신교수 관련 원심 파기, 서울대 대한민국 정부 무죄
1998. 4. 24. 고등법원 재판 시작
1999. 6. 25. 고등법원 선고 : 신교수 우조교에게 5백만원 배상 판결
1999. 7. 29. 상고 : 우조교, 신교수



1992년 5월 29일부터 서울대 화학과에 기기담당 조교로 취직한 우조교는 첫 출근 이후 지속적으로 신교수로부터 업무상 불필요한 고의적 신체접촉을 당했다. 우조교는 신체접촉을 모면하게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며, 불쾌감과 거부의 의사표시를 했다. 그러나 신교수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성희롱을 했고 93년 6월 우조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우조교는 이러한 부당한 조처에 대해 해결을 바라는 진정서를 대학에 보냈으나 서울대학교 당국은 진상조사는 커녕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결국 93년 8월 억울함을 알리는 대자보를 본 총학생회와 대학원 자치협의회, 여성문제 동아리협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진상조사 결과 우조교의 피해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학교당국은 묵묵부답이었고 오히려 신교수는 93년 9월에 우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이 사건의 의의

직장내 성희롱은 성적 친밀감 정도로 간주되어 직장내의 명랑한 분위기를 위해서 여성이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일반화되어 온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조교의 용기는 성희롱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불쾌감과 모욕감을 주는지를 알리는 데 기여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민사소송사건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판결은 국내에서 최초로 성희롱을 불법행위로 인정한 것이며, 1999년부터 남녀차별금지법(7월 시행)과 남녀고용평등법(2월 시행)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희롱이 처벌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음흉한 눈빛, 성적 농담 등의 성희롱에 얼마나 불쾌감을 느끼며,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지를 인식시키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남성중심적인 성문화를 바꾸어 가는데 큰 기여를 한 사건이다.






롯데호텔 성희롱 사건



사건 개요

롯데호텔 노동조합은 여성노동자조합원 382명을 대상으로 직장내 성희롱 피해 실태를 조사한다(2000. 6). 그 결과 전체의 70%가 심각하고 광범위한 성희롱을 경험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여성 노조원들은 직장 생활에서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로 '직장내 성희롱/성폭력'을 꼽았다.

- 직장 상사에 의한 성적 농담과 음담패설(77.2%)
- 신체에 대한 성적 언급(75.3%)
- 회식에서의 부르스(72.3%)
- 모욕적인 성적 발언(60.3%)
- 강간 및 강간미수나 성추행(21.6%)
이에 한국성폭력상담소 외 5개 여성단체와 민주노총, 한국노총 합동으로 노동부에 '호텔롯데 사업주의 직장내 성희롱 예방조치 위반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한다(2000. 7). 그리고 롯데호텔 여성노조원 270여 명은 신격호 사장 및 대표이사 3명, (주)호텔 롯데를 상대로 17억 6,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출한다(2000. 8).



=> 직장내 성희롱으로 집단 소송을 낸 최초의 사건!

노동부는 롯데호텔 성희롱 진정사건 조사결과 32명의 남성 임직원이 68명의 여성노동자들에게 성희롱 행위를 한 사실을 확인하고 30명은 징계조치하고 나머지 2명은 주의 조치하도록 통보한다. 또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지 않은 롯데호텔에 과태료 300만원을 부과한다(2000. 10). 그러나 롯데호텔은 노동부의 행정지도에 포함된 임직원 중 21명에 대해서만 재계약 해지·감봉(3명), 근신(10명), 견책(8명) 했을 뿐, 핵심 가해자 10인에 대한 징계는 진행중인 민사소송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징계를 유보한다고 발표한다. 게다가 이들 임직원 중 4명을 승진시킨다. 이에 노동부는 성희롱 가해자에 대해 부서 전환과 징계조치를 내리도록 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을 어긴 롯데에게 1인당 300만원씩 모두 3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였다(2001. 2. 4).



=> 성희롱 가해자를 징계조치하지 않은 이유로 부과된 최초의 과태료!

그러나 성희롱 가해자의 부서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밑에서 계속 일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 여성 노동자 5명은 성희롱 소송에 합류했다는 이유로 재계약 심사에서 탈락했다. 상급자를 성희롱 가해자로 진정한 직원이 해당 상급자에게 인사고과를 받는 상황이 벌어져 보복성 심사를 방치한 것이다.




이 사건의 의의

성희롱 피해자들의 집단 소송의 첫발을 뗀 이 사건은 성희롱 피해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사측에 피해보상 및 법적 책임을 묻는 첫 번째 사례로 모든 사업주에게 남녀 차별적 직장문화 개선의 책임이 있음을 각인 시켜주었다. 또한 성희롱을 진정한 피해 노동자가 미미한 가해자 처벌 후 결과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을 보여주어, 성희롱을 문제 제기한 피해 여성을 보호하는 법적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올 수 있었다.








강릉 K양 사건



사건 개요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7년간 지속적으로 마을 남성 7명에게 성폭행을 당한 강릉 김양 사건이 알려지면서 장애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조명을 받게되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마을 주민들은 김양의 가족들을 설득, 이 사건을 고발하게 되었다. 우선 주범인 홍명준에 대한 고발장만 접수시키면서 이후 '심신미약자에 대한 간음'으로 처리된 이 사건은 결국 공소원 없음으로 기각됐고, 12월 말 K양 가족이 홍명준에게 2백만원을 받고 합의함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됐다. 이에 대해 마을 주민들 사이에 성폭행범들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들도 성폭행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퍼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2000년 1월 말 28개 단체로 구성된 '정신지체 장애여성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공대위는 2월 가해자 중 5명을 가중처벌이 가능한 성폭력특별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2명을 불구속기소하고 1명을 기소중지, 2명을 무혐의 처리하는 것으로 수사를 일단락지었다. 그후 가해자 처벌을 위한 서명운동과 시위 등 강력한 여론으로 주범인 홍명준이 실형 2년을 선고받고 곧바로 구속 수감되었다.



장애인 성폭력의 특성

강릉 김양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부산의 Y양, 서울의 E양, 김해의 K양 성폭력 사건 등 그동안 묻혀있던 정신지체 장애여성 성폭력 사건들도 관련단체에 접수되면서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신지체 여성 장애인 성폭력은 일반 성폭력과 달리 특수한 문제를 안고 있다. 피해자가 성폭력에 대한 인지능력이 낮기 때문에 오랫동안 피해를 당하다 노출되는 경우가 많고, 피해 뒤 대처능력도 떨어진다. 또 피해사실을 알린다고 해도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감춰진 피해의 양상은 더욱 심각하며 성폭력피해자라는 특성과 장애인이라는 특성이 세심하게 고려되지 않아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피해여성이 방치되는 일이 많다. K사건의 경우 강릉경찰서식의 형법 적용보다는 정식으로 장애판정을 받아 성폭력특별법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성폭력 예방교육 필요성 제기 인식전환

또 공동대책위원회는 '여성장애우 성폭력실태와 대책마련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여 여성장애인 성폭력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적 공론화 작업에 착수했다. 여성 장애인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관계자들은 이들을 위한 성교육 성희롱 예방교육의 필요성과 장애인 시설을 갖춘 쉼터와 전문상담기관 마련 등을 제기했다. 이후 여러 단체에서 장애인 성폭력 예방과 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여성장애인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사회적 관심에 따라 2001년에는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대구, 부산, 전주, 서울에 '여성장애인 성폭력 상담소'를 열었다.





사단장 성추행 사건


사건 개요

2001년 1월 현역 사단장이 성추행 혐의로 보직해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육군은 부하 여군장교를 성추행한 혐의로 현역 사단장이던 김모 소장을 보직해임하고 육군 중앙징계위원회에 회부하였다. 김소장은 1999년 12월부터 약 6개월간 자신의 집무실 등에서 사단소속 여군장교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등 여러 차례 성추행하였다. 고민 끝에 피해자인 여중위가 고소장을 냈으나 하루만에 고소를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성추행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실이 알려지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성폭력피해자로서의 기본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가해자측으로부터의 회유, 협박뿐만 아니라 사생활과 관련된 근거없는 비난을 접하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피해자가 겪은 고통과 그간의 정황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김소장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군대내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보직해임과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김소장은 국방부에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었고, 결국 지난 3월 전역지원서를 지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군대내 성폭력이 근절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국방부 차관보와의 면담을 가졌으며, 국방부는 장병교육 강화, 고충심사위원회 운영, 성폭력 상담/신고 전담창구 개설 등을 골자로 하는 계획을 추진 중임을 밝혔다. 이 사건은 그동안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행해져왔던 군대내 성폭력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 군대내에 실제로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