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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안대응

공론화가 진행 중인 개별사례의 구체적인 쟁점을 알리고 정의로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활동을 소개합니다.
[후기] "동의로 착각했다는 변명" 상담·지원 현장의 이슈 대응 집담회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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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또는 협박’을 중심으로 성폭력을 판단하는 한국의 형법 체계에서 술이나 약물에 취해 의식이 없는 사람을 강간한 자는 “준강간”이라는 죄로 처벌됩니다. 가해자가 폭행이나 협박을 하지 않고도 강간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봐서 별도의 법을 둔 것이죠. 그런데 준강간죄는 정말 이상한 법 조항입니다. 피해자가 술에 취했지만 의식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어서 당시 피해 상황을 진술했다면,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준강간이 아니라고 하고 피해자가 아예 의식이 없을 때에는 당시의 상황을 진술할 수 없어서 피해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는 틈을 파고들어 당시 상황을 입맛대로 편집하고 피해자가 동의한 줄 알았다며 “동의로 착각했다는 변명”을 합니다. 그리고 법원은 가해자의 고의를 충분히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다며 무죄 선고를 합니다. 여기서 피해자가 의식이 없었던 남아있었던 당시 상황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고 피해자가 처한 상황과 맥락은 삭제됩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상담 지원 현장에서 이런 상황을 너무도 많이 목격합니다. 7월 21일 오후 7시, <동의로 착각했다는 변명> 집담회에서는 여성주의상담팀의 앎 활동가가 무죄가 선고된 준강간 사례 2건을 발표하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수면 중 연인에 의한 준강간치상”으로 법원은 정황상 평소와 달리 합의한 성관계가 아니었다는 정황과 가해자가 스스로 범행을 인정한 녹취록을 무시하고 가해자가 ‘동의한 줄 알았다’는 변명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 측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이용하여 피해자를 공격했고 법원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연인 관계였다는 이유로 잘못된 통념에 기반하여 가해자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만취해 의식이 없던 중 직장 동료에 의한 준유사강간치상”입니다. 이 사건에서도 역시 법원은 피고인의 범행 고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하면서 “피해자가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이는 주취에 따른 일시적 기억상실인 ‘알코올 블랙아웃’ 현상에 의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피해자가 ‘블랙아웃’이었다는 것은 ‘피해자가 그 당시에는 동의했으나 기억상실을 한 것뿐이다’라는, 준강간 가해자가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활용하는 전형적인 주장인데 많은 법원이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고 결국 준강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처벌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피해자는 가해자와 전혀 사적으로 친밀한 교류를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법원은 당시 맥락을 무시하고 ‘이성적 호감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는 가해자의 일방적인 변명을 들어주었습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준강간죄 판단기준의 모순을 짚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각성 상태와 의식 상실 상태는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데 준강간의 ‘항거불능’이라는 구성요건은 피해자로 하여금 “피해의 기억이 허상은 아니면서도 당시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음을 주장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하게 합니다. 한편, 법원은 통상적으로 ‘평소 주량 대비 음주량’을 확인하는데 주량은 사람마다 기준이 모두 다르며 몸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인 기준입니다. 또한, CCTV영상이 객관적 증거로 간주되지만, 피해자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기에 (상담 현장에서 CCTV 증거는 준강간죄에서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피해자가 만취했으나 영상에서는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니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다는 식입니다.) 이 과정들은 판사의 통념에 기반하여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피고인의 동의로 착각했다는 변명은 대개 “성적 접촉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가만히 있었다”,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은 묵시적인 동의로 보아도 무방하다”라는 왜곡된 성폭력 통념으로 이루어져 있고 통념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법원 역시 남성중심적인 관점으로 이런 주장을 채택합니다. 이때 블랙아웃은 “기억이 안 난다는 피해자의 주장과 합의 성교였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동시에 수용하는” 역할을 하며 법원은 피해자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했을 가능성을 판단해야 하지만, 성적 동의에 대한 이해가 없는 법원은 동의를 구체적으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법무법인 이채 정명화 변호사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기준을 확장한 판례를 공유했습니다. 한 판례는 알코올 블랙아웃과 관련하여 “피해자가 의식상실 상태에 빠져 있지 않지만 알코올의 영향으로 의사를 형성할 능력이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행위에 맞서려는 저항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였다면 ‘항거불능’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피고인의 ‘블랙아웃’ 주장을 단순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당시 정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다른 판례는 “특별한 친족관계나 정신적.경제적 지배.예속관계 등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피고인”이 “점진적.누적적”으로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가한 강간에 대해 항거불능 상태를 인정했습니다. 또다른 판례는 피고인이 피해자가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강간하였으나 피해자가 사실상 잠든 상태가 아니었고 두려움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준강간죄의 불능미수”를 인정하였습니다.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던 상황에서 준강간죄로 보기도 어려울 때 법원이 사실상 비동의 성교임을 인정한 것이지만, 법적 한계로 기껏해야 미수범으로 처벌했던 사례입니다. 


2020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세부통계에 따르면, 술과 약물, 수면이 동반된 성폭력 피해 상담 비중은 전체 상담의 무려 5분의 1이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피해자들이 술,약물,수면 상황에서 피해를 겪고 있지만, 강간죄와 준강간죄 사이에서, 완전히 또렷한 의식 상태와 완전히 심신상실된 상태 사이에서 피해를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 발제를 통해 강간죄를 개정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성폭력 형법체계에 피해자 동의 여부가 중심이 되면, 피해자가 저항할 수 있는 상태였는지를 기준으로 강간과 “준”강간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 현실의 성폭력이 미끄러지고 처벌받지 못하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성적 동의는 명시적이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도 확실하게 자리잡아야 할 것입니다. 발제가 끝나고 두 피해자 분의 말하기가 있었는데 그 중 한 피해자의 말하기를 인용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가해자의 말이 그토록 쉬웠던 것은, 그것이 빌려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는 진실이 아니라 통념에 기대어 말합니다. (중략) 빌려온 말은, 빌려준 세계가 바뀌면 무너집니다. (중략) 그 세계가 좁아지는 만큼, 그 말은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좁히는 것이 바로 피해자들의 어려운 말하기입니다. 피해자의 말하기는 진실이기에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바뀔 것 같지 않던 세계를 끈질기게 바꾸어왔습니다. (중략) 그것을 믿기에, 오늘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유랑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