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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화운동

성폭력에 맞서기 위해 대안적인 관계, 일상, 실천을 만들어가는 성문화운동을 소개합니다.
[후기] 우리는 동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 2022-08-01
  • 1997



<성적 동의: 지금 강조해야 할 것>, 밀레나 포레바 지음, 함현주 옮김 | 마티


2017년 가을, 성폭력 피해자들은 ‘#미투(me too)’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미투 운동이 있기 전, 피해자들을 향한 사회적 낙인과 사법 시스템의 허점으로 인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과 피해자의 고통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성폭력 생존자들과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반(反)성폭력 의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수십년간 노력했고, 그 결과 수많은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이 줄지어 고발되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성적 관계에서 동의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끊임없이 강조되며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에 대한 지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많은 이들은 동의를 단순히 좋다 또는 싫다로 나뉘는 이분법적 개념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동의의 문제에 있어 딱 짚어 답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여럿 존재한다. ‘싫다’고 말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인지, 협박, 애원, 괴롭힘을 통해 얻어낸 ‘좋다’라는 대답을 동의라고 볼 수 있을지,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좋다’고 한 대답 역시 동의인지 등을 생각해보았을 때 동의의 개념은 결코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만 다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이처럼 쉽사리 정의 내리기 힘든 ‘성적 동의’에 대한 여러 쟁점과 논의를 다룬다.


저자는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는 강간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말하면 성적 동의는 나와 상대방의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하는 것인데, 이때 전제가 되는 신체적 자율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결정을 내릴 때 어떠한 외부의 압력, 강제, 권력 행사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하는 것, 즉 동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물어보기’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상대방의 경계를 알고 조정하는 과정인 동의 협상 이전에 묻는 단계가 필수이다. 이는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또는 오래된 연인 관계 등 예외 없이 어느 관계에나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성적 동의가 굉장히 제한적으로 다루어지거나 아예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책에서 이에 대한 이유를 크게 강간 문화, 지배적 성 각본, 그리고 법의 한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강간 문화란 가해자가 성폭력을 저지르기는 쉽고,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고 구제받는 것은 어렵게 만드는 사고방식과 사회 구조를 뜻한다. 이를테면, 성관계를 거부하기가 허락하는 것보다 어렵고, 아무 상관없는 행동을 동의로 간주하며, 불확실한 정황에서는 피해자를 지지하기보다 가해자 편을 드는 태도들이 강간 문화를 구성한다. 젠더 뿐 아니라 인종, 성적 지향, 나이, 장애 등 차이를 권력의 도구로 삼아 특정 집단을 성폭력에 더 취약하게 만드는 것 또한 강간 문화의 일면이다. 이러한 강간 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여 신체적 자율권 행사 의지와 가능성을 제한한다.


강간 문화는 특정한 성 각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회 내 지배적 성 각본은 비장애, 유성애, 시스젠더, 그리고 이성애 규범에 의해 형성된다. 이 각본에 따르면, 일반적인 성관계는 한 명의 시스젠더 남성과 한 명의 시스젠더 여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성기 결합이며, 키스와 스킨십으로 시작해서 남성의 사정으로 끝나는 일련의 과정이다. 즉, 지배적 성 각본은 성관계에 대한 논의를 삽입 중심적, 시스젠더적 관계로 국한시킨다. 이 각본에서 배제된 무성애자, 장애인, 퀴어 등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거나 상대적으로 성폭력에 더 많이 노출된다. 법이 지배적 성 각본을 따라 남성 성기의 삽입을 강간의 필수 요건으로 정하고(대부분의 나라에서 삽입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형태의 성폭력 관련 법을 따로 둔다) 이것만을 ‘동의 여부’를 따질 수 있는 경우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행 강간법 뿐만 아니라 수사기관과 재판부의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한 2차 피해 역시 강간 문화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함을 지적한다.


또한 그는 대중문화 속 동의의 부재에 대해서도 짚어낸다. 미디어에서 성과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방식은 대부분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고 동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지만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몇몇 의미 있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일례로 영화 <데드풀>에서는 주인공들이 성관계에 대하여 동의 협상을 하는 장면이 진지하게 다루어졌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성적 동의의 개념을 개인 간의 은밀하고 사적인 협상이 아닌 사회 구조, 문화, 권력 작용이 얽힌 개념이자 실천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성적 동의는 사회적으로 공유된 행동 지침을 요하는 문제인 것이다. 성적 동의가 사회적 개념으로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법적 변화, 대중문화의 ‘동의’ 개념 포용 등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폭력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의 공유와 연대이다. 이들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피해 사실과 그때 겪었던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그 경험을 재해석할 수 있게 도와주고, 설명하기 어려운 찜찜한 순간을 성폭력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경험을 공유하고 인정하는 과정은 성폭력을 더 이상 개인들의 비극이 아닌 사회와 집단의 문제라고 인식하게끔 한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콘텐츠기자단 틈의 지윤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