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림터
  • 울림
  • 울림
  • 열림터
  • ENGLISH

법·제도 변화

성폭력 및 여성 인권 관련 법과 제도를 감시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법 제·개정 운동을 소개합니다.
2024 총선대응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 릴레이 ‘정치 에세이’ 일곱번째
  • 2024-04-09
  • 498


🌱릴레이 정치 에세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선거를 앞두고 느끼는 고립감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 속에서 길어올린 우리가 바라는 가치, 정책, 정치에 대한 글입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존중받는 정치를 원해 

동은(한국성폭력상담소 콩깍지 프로젝트)

정치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함께 살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내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동주거 경험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원가족과 사는 집에서 나오고 싶지만 돈은 없었던 나에게 공동주거협동조합은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월세도 시세에 비해 저렴하고, 전세자금이라는 목돈 없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었다. 외로움도 걱정이었는데 3~5인의 내 또래 사람들과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것도 든든했다. 그러나 곧 함께 살기는 각자의 처지가 언제든지 갈등 상황으로 번질 수 있고, 그래서 협의와 조정이 상시적으로 필요한 고된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 워크샵 중 진행한 <페미·가치·정치 만다라트> 그리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함께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공동생활비를 걷어 식재료를 살 때는, 동물복지 계란을 살 것인지, 적어도 공동 식자재는 비동물성 재료로만 채울 것인지 몇 번이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왜 필요하고 무엇이 부담스러운지 서로가 설득되어야 했고, 그래서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 함께 살기의 여러 쟁점 가운데에서도 가사노동은 갈등의 핵이었다. 청결수준이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누가 가사노동의 압박을 더 많이 받는지, 누가 어지러운 거실을 못 본 척하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치열하게 다투었다. 가사노동에 ‘더 익숙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바깥일이 더 중요하고 집안일은 사소하다는 우리 안의 가치 평가가 만들어내는 문제라는 공동의 이해에 도달하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조합 차원에서 다룰 것인가를 두고도 의견이 갈렸다. 어떤 이는 조합비를 더 걷어서 그 돈으로 민간 청소 업체에 일부를 맡기자고 했다. 다들 바쁜 우리가 싸우지 않고 각자도 여유시간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가사노동에 대한 우리 안의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하고, 각자가 고르게 훈련될 수 있도록 관계 안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빠른 답은 없었고, 지지부진하기도 했지만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할 것인가 머리를 맞대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 삶의 문제를 우리가 다루고 있다는 건강한 자신감을 얻기도 했었다. 정치가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이라면 정치의 필요성이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9회 한국여성대회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그런데 지금의 현실 정치에서는 함께 사는 방법을 까먹었거나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는 이들이 ‘정치’라는 이름표를 달고 말과 행위를 독점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총선을 앞두고 보이는 여의도 정치의 문법은 누가 배지를 달 것인가에 관한 굉장히 협소한 의미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내 삶에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인식도, 제안도 찾기가 어렵고 ‘비非시민’으로 함부로 낙인찍으며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비혼으로,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노동하면서, 혈연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어떻게 연결되면서 살 것인가가 고민인 나에게 이번 총선 과정에서 정치는 등을 탁 치며 “꿈 깨”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가족제도에 들어가고, 아이를 낳기만 한다면 혼수비용도 주고, 집도 주고, 육아휴직도 많이 주겠다는 공약이 쏟아졌는데 이것이 실효성 있는가와는 별개로 나에겐 가족제도 밖의 삶은 보장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이 들렸다.  게다가 정치 공간에서 ‘20대 여성’이라는 나의 처지는 존재하지 않는 성차별을 주장하며,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간다는 언설들로 왜곡되기 일쑤이다. 표를 얻어내기 위해 혐오의 대상으로 활용되고,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정치세력으로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행보들을 보여왔음에도 적극적인 ‘젠더 삭제’ 정치 기획 가운데 정치적 효능감을 얻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지난 2개월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 어이없는 시민 대우에 성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가 원하는 정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 속에서 어떻게 공동의 것을 만들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정치, 한쪽을 배제하면 한쪽이 승리하는 선수들의 경쟁이 아니라 동료들이 하는 팀플레이로서의 정치, ‘민주주의의 완성은 성평등’이라는 말이 진지하게 탐색되는 정치가 우리 곁에 당도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