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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도 변화

성폭력 및 여성 인권 관련 법과 제도를 감시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법 제·개정 운동을 소개합니다.
[후기] "형사공탁 특례제도 : 성폭력 사건에서의 적용을 중심으로" 교육
  • 2023-03-02
  • 1960

형사공탁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공탁”은 법령의 규정에 따라 국가기관(법원의 공탁소)에 금전이나 물품 등을 맡겨 법률적 효과를 얻는 제도입니다. 채무자가 빚을 갚으려고 하는데 채권자를 알 수 없거나, 채권자가 이를 거부하는 경우에 국가기관에 대신 금전 등을 맡기는 것으로 빚을 갚는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지요. 형사사건에서는 가해자가 제시한 손해배상금을 피해자가 거부한 경우에 가해자가 형사변제공탁을 할 수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폭력 사건에서는 가해자가 합의를 원하나 피해자가 거부할 경우에 가해자가 공탁소에 위자료를 포함한 손해배상금을 맡겨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형사공탁에 대한 특례제도가 신설되어 2022년 12월 9일부터 시행 중인데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형사공탁 특례제도가 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2월 24일, 상담소의 이도경 상근변호사로부터 특강을 들었습니다.

원래 형사공탁을 하려면, 수령인의 성명,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의 신상정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고 가해자가 공탁금을 맡기는 것도 원하지 않을 시, 신상정보를 알려주지 않으면 되었죠. 그런데 최근 시행된 형사공탁 특례제도는 아래와 같이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지 못해도 공탁을 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공탁법 제5조의2(형사공탁의 특례) ① 형사사건의 피고인이 법령 등에 따라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 수 없는 경우에 그 피해자를 위하여 하는 변제공탁은 해당 형사사건이 계속 중인 법원 소재지의 공탁소에 할 수 있다.


상담소 활동가들은 이 조항의 내용이 우려스러웠습니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대체로 공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심으로 피해자를 위로하고 보상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탁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성폭력 감형 조건으로 고려되는 요소에 대해 판례들을 분석해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서에 따르면,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합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피해에 대한 상당한 보상이 이뤄진” 사실은 중요한 감형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가해자는 일말의 반성하는 마음이 없어도 그저 형을 줄이기 위해 죄를 뉘우친 것처럼 보이려고 갖은 수를 씁니다. 그전에는 피해자에게 사과 한마디 없다가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부에 반성문을 매일 써서 제출하거나(가해자를 위한 반성문 대필 서비스도 있다고 하죠.) 성폭력상담소에 갑자기 후원금을 보낸 후, 반성하는 마음으로 성폭력 피해지원 단체에 기부했다는 식입니다.

그리고 합의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재판부에 보여주기 위해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는데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에게 접근하기도 합니다. 이때 합의 시도가 거절됐다면, 가해자가 마지막으로 시도할 수 있는 것이 공탁입니다. 일부 판결에서는 공탁금 수령 여부를 떠나 가해자가 공탁한 사실 자체가 피해자와 합의의 의사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감형 요인으로 적용되기도 합니다. 이때 판결문에는 “피고인이 당심에서 피해자를 위하여 OO만 원을 공탁하는 등 피해 회복을 위하여 노력한 점” 등으로 인용되지요. 그런데 이제 피해자의 신상정보가 없어도 공탁이 가능해진다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가해자가 감형만을 위한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공탁을 시도하지 않을까요? 피해자가 인지하지 못했는데 가해자가 죄를 반성한 것이 되어 재판에서 감형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특례제도가 도입된 것일까요?

법원행정처는 기존에 피고인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아내고 해당 피해자를 찾아가 합의를 종용하고 협박하는 등 2차 피해가 많이 발생하여 피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피해회복을 위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모르는 경우에도 공탁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자 특례제도를 도입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러한 도입 취지를 잘 살리려면, 재판부가 공탁 사실 자체만으로 가해자가 반성했다고 해석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우연히 알게 된 피해자의 정보를 바탕으로 공탁한 사건에 대해 한 판례는 이렇게 명시하며 피고인의 공탁 사실을 감형 요소로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공탁이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받았던 마음의 상처에 관한 충분한 이해’와 ‘합의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2차 피해의 가능성에 관한 세심한 배려’ 없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피해자 측이 강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는 이상, 이 사건 공탁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삼는 데 신중할 필요도 있다. (광주고등법원 2021. 10. 8. 선고 2021노129판결)"

재판부가 고려해야 할 것은 형식적인 반성이 아닙니다. 재판부는 가해자가 공탁한 사실을 넘어 진지하게 반성하는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날 때에야만 이를 감경요소로 고려해야 합니다.

형사공탁 특례제도가 이제 막 도입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가해자들이 이를 어떻게 이용하고 어떻게 판결이 나올지는 아직 모르지만, 좋은 취지로 도입된 제도가 악용될 것을 사전에 방지하며 앞으로 재판부를 잘 감시해야겠다고 생각한 교육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유랑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