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림터
  • 울림
  • 울림
  • 열림터
  • ENGLISH

연구·교육

여성주의적 담론생산을 위한 연구와 반성폭력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공유합니다.
[후기] 어쩔줄모르는 겁쟁이에서 담담한 겁쟁이로 - <4주 완성!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 2024-05-02
  • 218


다른 사람들은 제법 수월히 하고 해내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엄두도 내지 못하거나 어려워하는 나를 꽤 오랫동안 어여삐 여기지 못하며 지내왔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기, 아침식사하기, 사람과 마주하거나 대화하기, 대체로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을 제외하고 매일매일 해야하는 모든 일들이 다 쉽지 않아서 하루하루가 참 버겁고 지쳤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민감성이 높아서 사소한 것들에도 자극을 크게 받았던 것 같고, 그로 인해 걱정도 많고 불안도 많아 소진이 빠르다보니 늘 배터리가 2%남은 스마트폰처럼 간당간당한 상태였던 것 같다.

나를 좀 더 안전한 환경에서 보호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간당간당한 나를 데리고 오히려 세상에 맞추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나의 감각과 거리를 두게 된 것 같다.   

디폴트가 쉽지 않은 것을 견디고 버티는 상태이다보니 학교에 가지 않을 정도로 아프다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 아픈 것인지, 친구가 어느 정도로 말과 행동을 심하게 해야 불쾌해도 되는 것인지 알기가 어려워 아픈 채로, 불쾌한 채로 참고 견디는 능력만 발달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약한 존재들에게는 비슷한 경험들이 있지 않을까. 나의 감각을 신뢰하기 어려운 상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은 나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의 감각을 믿어도 된다고 허용해주는 경험이었다.

첫 시간 실습 중의 하나는, 인적이 드문 버스정류장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오는 상황이었다. 

그럴때 실제 나의 감각은 겁이 난다고, 무섭다고 신호를 보내지만, 나는 그런 나의 신호를 예민하다고 무시하는 쪽을 선택해왔다.

저 사람도 그냥 버스를 타러 오는건데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때로는 심지어 내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이 상대에게 큰 실례라도 되는 양.(나 자신아, 미안)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에서는 그런 나의 감각을 믿어도 된다고, 나의 감각에 따라 나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행동을 해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상대의 위협적인 움직임을 모르는 척 등돌리지 않고 상대를 향해 양 발을 단단하게 딛고 양 손으로 나를 방어하는 자세를 취해도 된다고 몸으로 배운다.

늘 약한 존재의 위치에서만 나를 바라보다 내가 나를 지키고 방어할 수 있음을 몸으로 확인하고, 또 동료의 도움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는 경험을 통해 내가 가진, 가질 수 있는 강함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 항상 대응하고 싸우고 정의를 구현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도망쳐도 된다고 이야기해줘서 겁쟁이인 나를 덜 자책할 수 있는 위로가 되기도 했다.

또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행동들, 피하고 구르고 빠르게 일어나고 상대의 팔을 꺾거나 신체를 가격해보는 경험을 통해 나라는 대상의 활용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언젠가 캐리어를 끌다가 손잡이를 잘못 눌렀는데 평소보다 훨씬 높이 빠져나와 그동안 내가 불편하게 사용해왔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란 후에 오래 억울했던 적이 있다.

캐리어 손잡이의 가능성을 오래 모른 채 사용했던 것처럼,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해 잘 몰랐고 또 그 제한된 경험을 바탕으로 나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차단해왔음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엔 억울해하지 않고 기쁘고 감사해보려고 한다.



겁쟁이에게 새로운 시도나 새로운 환경, 사람들은 꽤 큰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는데, 겁쟁이인 내가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신청하고 참여할 수 있었던 분명한 이유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환경에서 무리가 되지 않게 나의 수준만큼, 나의 속도대로 배울 수 있으리라는 신뢰.

역시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름 아래 모인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공감을 보내고 다양한 대응 시나리오를 떠올려보는 경험이 자기방어를 위한 단단한 자원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내고 조금 더 시도해볼 수 있었다. 나 혼자 어느 도장에 주짓수나 격투기를 배우러 갔다면 금세 포기하거나 쉽게 자책에 빠졌을 수 있었으리라.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에 열심히 참여했고 잘 마쳤지만, 여전히 실전에서 얼마나 적용가능할지는 미지수다.(이런 나라서 죄송...)

나는 여전히 겁이 많고, 또 인간이 위기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자동적으로 얼어붙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통해 나의 감각을 좀 더 신뢰하는 경험을 했고 여러 대응방법을 배웠기에, 위험자극과 자동적으로 얼어붙는 반응 사이에 무언가를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조금 해보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큰 변화이다.(겁쟁이의 장점은 사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안다는 것!)


어쩔줄 몰라하는 겁쟁이였던 내가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들은 후에는 조금 더 담담한 겁쟁이가 된 것 같다.

나와 같은 겁쟁이들이 겁많은 스스로를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더 조심조심 자신을 어여삐여기고 우쭈쭈하며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처럼 겁쟁이의 피로도를 낮출 수 있는 다양한 삶의 기술들을 스스로에게 배울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4주 완성!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참여자 ㅅㅎ 님께서 작성해주셨습니다>